▲ 윤선자 사학과 연구교수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정치적 풍자가 유행이다. 그 중에는 권력 앞에 주눅 들었던 서민에게 ‘쫄지마’라고 외치며 공감대를 넓혀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막말’이 야권 총선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을 탓해야 할까?

오늘날의 정치적 풍자와 비슷한 풍자정신이 ‘광기(Folie)’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풍미한 때가 있었다. 새로운 활력과 상상력으로 가득 찼던 르네상스 시기이다. 물론 그 시기는 불안했다. 낡은 것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것들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였는지 모르겠다. 특히 바흐친이 말한 엘리트 문화와 광기 정신의 결합마저.

광기하면 현대인은 정신적인 질병을 떠올린다. 그것이 근대적 편견임은 이미 오래전에 푸코가 밝혔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시대 광기는 신적인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무모함(hubris)이었단다. 중세에는 어리석음의 징후이기도 했지만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보는 남다른 신비한 능력을 의미했다고... 르네상스 시기 광기 정신은 중세의 양가적(兩價的) 의미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도덕적 성격이 더해졌다. 세상의 정치적 질서를 뒤집어 보는 남다른 능력, 즉 풍자 정신이다. 하지만 그 풍자는 냉소적인 독설이라기보다는 웃음을 터트리는 유쾌한 역설, 친숙함과 긍정을 담아내는 아이러니들이었다.

푸코는 광기를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의 특징이라고 했고, 호이징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이처럼 광기가 그 시대 문화의 키워드가 된 데는 축제의 역할이 컸다. 왜? 축제의 정신은 일상의 일탈과 뒤집기, 광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으려는 과도기였던 지라 풍자적 비판 정신이 넘쳐났다. 늘 그랬듯이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성이나 사내답지 못한 남성들은 당연하고, 악덕상인, 부패한 정치인, 타락한 성직자들도 축제 때 끌려 나와(대부분 당사자의 마네킹) 내팽개쳐지고 오물이 던져지고 두들겨 맞았다. 이런 ‘정치적 연극’을 지배한 담론은 익살과 조롱, 욕설이 난무하는 광기 담론이었다. 거침없는 풍자로 유명한 디종의 축제 단체, 메르 폴(Mère Folle:미친 어머니라는 뜻)의 연극무대는 ‘욕설의 마차’로 불렸다.[그림 1]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택한 이 단체에게 광기란 뭐였을까? 그들이 들고 있는 지팡이 끝에는 광인의 머리가 달려있는데, 그 머릿속에서 피어난 꽃이 있다. 지혜의 상징인 물망초다. 또 그들은 광인의 머리와 학자의 머리를 조합한 독특한 이미지를 인장으로 사용했다.[그림2] 광인과 학자, 즉 광기와 광기는 같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광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또 다른 지혜였다.


축제라는 공간에서 울려 퍼진 광기 담론은 회화와 문학에도 영감을 주었다. 그 영감은 이미 쇠퇴해가던 중세 스콜라주의와 상징주의에 비집고 들어가 광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중세 스콜라주의에 의하면 신의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고유하고 순수한 존재이유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학문과 예술에서 상징을 통해 이해되고 표현되었다. 하지만 스콜라주의를 공격한 신비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의 순수한 본질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없다. 그건 상상이나 이론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오히려 현실의 모든 존재는 대립과 모순의 요소들을 내포한 ‘하나의 둥근 공’과 같다. 대립과 모순의 총체로서의 세계, 그것이 진리이고 지식이다.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광인의 담론, 그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광기의 이미지가 담아내려는 것도 바로 이 진리이다.

회화에서도 역시 광기는 또 다른 지혜를 의미했다. 보쉬의 <광인의 배>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광인이다.[그림3] 그만이 느긋하게 음식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보쉬의 또 다른 그림 <광기 치료>에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머리의 돌을 꺼내 광기를 치료하려는 ‘돌팔이 의사’이다. 지혜로운 것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 알고 보면 지혜로운 것이다. Sophomore! 뒤러의 <멜랑콜리>는 암시적이지만 훨씬 더 명확하게 광기의 의미를 드러낸다.[그림4] 거기서 멜랑콜리(광기)가 의미하는 바는 탐색과 사색이다.

북유럽 인문주의의 대표작, 에라스무스의 <광우예찬>은 이런 문화적 토양의 산물이다. 그 책이 중세 스콜라주의와 교회를 비판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비판의 전략이 광기였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광기의 신 모리아(Moria)는 세상의 모든 생명과 기쁨, 행복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광기는 자연이며 자연에 가까울수록 인간은 행복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나...그리고 광기는 또 다른 지혜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왜? ‘예수의 어리석음’을 통해 그 점을 보여준다. “예수는 가장 어리석은 여성과 아이들, 어부와 어울렸으며, 어리석음의 상징인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무엇보다 신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태어나 십자가 희생을 자처했으니 그 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어리석음으로 인류를 구원했으니 그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그림5] 이처럼 에라스무스의 문학에서도 광기와 지혜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 허물어진 경계 속에서 중세 스콜라주의도 점점 해체된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에게도 광기의 정신은 남아 있다. 그는 <독일 기독교인에게 고함>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을 ‘어리석은 말을 하는 광인’에 비유한다. 하지만 본문으로 들어가면 그의 담론에는 더 이상 에라스무스 식의 유쾌함과 익살이 없다. 냉소적이고 급진적인 공격과 민족적 열정만 가득하다. 그는 이미 그 시대의 광기가 만들어낸 혁명가이다.

르네상스 시기 광기 정신은 역설과 아이러니, 조롱과 익살로 이루어진 풍자 정신이었다. 거기엔 신성한 것을 비하시키는 패러디, 성적인 육체와 행위를 강조하는 외설, 거친 욕설들이 뒤섞이기도 한다.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삶이 부딪치는 공간, 광장과 시장의 언어이다. 바흐친은 그것을 축제적 표현주의, 혹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그것들은 양가적 의미를 가진다. 저속한 표현들을 통해 위의 것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권위를 탈 신비화시킨다. 낡은 것을 새것으로 대체하며 풍요와 다산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광기 담론은 이런 언어 전략을 사용해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개념을 뒤집고 무화(無化)시키는 가운데, 중세 세계를 서서히 해체시켰다. 비록 새 시대를 만드는 임무는 이성에게 빼앗겼지만 광기가 없었다면 낡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낡은 질서를 새 질서로 바꾸려는 열망이 팽배할수록 ‘또 다른 시각’ 혹은 ‘또 다른 지혜’로서의 광기 담론도 유행하는 듯하다. 권위에 대한 조롱과 역설, 패러디를 함께 소통할 수 있고 함께 변화를 지향해 나갈 수 있는 넓은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인터넷이나 케이블 TV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정치 풍자와 패러디, 정치 코메디쇼는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의 또 다른 현상일 뿐이다. 그것이 단순히 정치담론을 소비하는 형태의 변화만이 아니라는 점은, 지난 서울 시장선거에서도 드러났다.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현실적 힘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 풍자가 그저 표현이나 담론의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때 ‘위험한 현상’으로 권력의 감시망에 포착된다. 역사에서도 그랬다. 17세기 들어 축제는 탄압을 받았고 광인은 감금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르네상스 시대 광기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바흐친이 말했듯이 우린 이미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 하에서 광기의 양가적 정신은 비합리적인 저속한 사고일 뿐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만 약간 부각시켜도 쉽게 매도시킬 수 있는 이유이다. 사실 ‘근대인’ 앞에서 정치적 풍자와 패러디는 참으로 취약한 사상누각일지 모른다. 최근의 잇단 ‘막말 파동’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막말’을 했다는 이유로 총선에서 패배하고 연예계에서 퇴출당하고 정계에서도 공식사과가 이어진다. 물론 막말과 정치 풍자는 다르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정치 풍자에 대한 더 많은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 다름을 파악하기는 참 쉽지 않고 그래서 정치 풍자의 생산자가 그 경계를 넘어 가능성도, 그 소비자가 정치 풍자를 막말로 치부할 가능성도 늘 존재한다. 보수 세력이 정치 풍자를 탄압하기 위해 막말을 유용한 ‘프레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거이다. 마치 중세 말과 근대 초 모든 반대세력이나 주변인을 탄압했던 위해 사용되었던 만병통치약, ‘마녀의 망치’처럼... 그리고 냉전시대 위력을 떨쳤던 색깔론처럼 말이다. 허위사실을 근거로 상대를 모독하고 상처를 주는, 비인간적인 막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건전한 정치 풍자를 막말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정치적 풍자의 한계를 정하기에 앞서 이런 근본적인 전제들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 중 어느 것이 더욱 본질적이고 치명적인지? 요는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자신의 폭력은 묻어둔 채 언어적 폭력을 탓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언어의 폭력에 있어서도 그 형식이 중요한지 내용이 중요한지? 고상한 말투로 휘둘러진 언어는 죄가 되지 않고, 거친 말투로 휘둘러진 언어는 죄가 되는지? 형식을 떠나 그 언어가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때, 그 언어가 ‘더’ 죄이고 폭력은 아닌지? 물론 언어 역시 한 인간의 인품의 척도인 만큼 아름다운 것을 택해 사용해야 함은 당연할 텐데, 이 경우 언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의 미학적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의 결론이 어떠하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풍자는 인간존중과 진실, 웃음과 인간적 따스함을 담아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막말’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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