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깨고 경계 허물어야



다양한 민족문화에 뿌리를 둔 제3세계 문학이 오늘날 위기에 봉착한 서구문학을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에서는 제3세계 문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합니다. 이에 본지에서는 여섯차례에 걸쳐 제3세계 문학의 정의와 가능성을 살펴보고, 현재 제3세계에서 발표되는 문학의 흐름을 조명해보는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기획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제3세계 문학의 오늘
(2)제3세계 문학 보기-인도편
(3)제3세계 문학 보기-케냐편
(4)제3세계 문학 보기-인도네시아편
(5)제3세계 문학 보기-이집트편
(6)제3세계 문학 보기-나이지리아편
 
 
타문화 이해는 또 다른 문화 생산 
 
모든 학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기호와 정보가 인간의 뇌기능을 대신하는 오늘날 인간은 그야말로 공상과학적 사이버 펑크나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 환상이 만들어내는 구조물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하나의 텍스트로 둔갑하고, 기존의 가치와 영역이 서슴없이 인간에 의해 허물어지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 발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은 서양이건 동양이건 공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한 나라의 문화가 그 나라의 수사적 산물이고 무의식중에 독자를 설득하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고 해도,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 심미적 관점을 경험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영역과 한계 그리고 폭과 깊이를 가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식민지 경험한 주변국 ‘제3세계’
제국주의적 발상 내포하기도

다른 한편으로 필자가 원고청탁과 함께 정해진 기획물의 타이틀에 따라 ‘제3세계’란 표현을 여과시키지도 않은 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 스스로도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제3세계란 용어는 냉전의 틀 속에서 생겨났고, 역사적으로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미국과 동맹국들은 1세계였고 구소련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2세계, 그리고 식민지 경험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주변 세계가 3세계였다. 전 세계 인종 가운데 80% 이상의 절대 다수가 유색인종이며 지구상 식민지 경험을 했던 대륙도 거의 동일한 퍼센트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두고 생각한다면 제3세계란 말이 얼마나 편의적이고 주변성이 강조된 제국주의적 발상의 비극적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재, 2억이 넘는 미국 인구의 68%가 백인이나 앞으로 8년이 지나면 백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50%로 낮아진다. 

‘제3세계 문학’의 이해로
화해와 교류의 4차원 단계 도약해
 
4세기 이전 농경시대, 백인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농경기술을 100년 가까이 전수 받아야 했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백인의 우월한 문화를 강요하기 전에 이미 피식민지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는 모순을 보여 주었다. 이런 혼돈과 아이러니 가운데 소위 ‘제3세계’는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항상 억압된 역사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서구의 지배담론에 맞선 3세계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주류, 비주류 사회로 하여금 소외되고 배척 당해온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바탕이 되었다. 지배문화에서의 글쓰기가 항상 저항행위로 나타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3세계 문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우리 자신을 타자의 입장이 되어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비단 문학이나 문화 아니면 예술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제3세계 문학 그 이면에는 상호배려가 부족했던 어두운 시대가 있었고, 암흑 가운데 뿌려진 제3세계 문학이란 씨앗은 보수와 독단 그리고 문화적 횡포와 지배에 대한 저항행위로 자랐으며, 급기야 지배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날 인종간의 화해와 동서양의 교류가 강조되는 긍정적인 4차원적 단계로 발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고정관념 깨고 경계 허물어야

거듭되는 말이지만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을 발휘하는 작가들은 거의 제3세계의 작가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호주, 아일랜드, 뉴질랜드, 그리고 아시아권 작가들이 바로 그 주체들이다. 이들이 높이는 비판적 목소리는 과거 백인 주류사회가 강요했던 보편주의이다. 철저히 이분법적 논리로 타자를 스테레오타이프(고정관념)하는 그 이중성 말이다. 흥미로운 현상은 그러한 보편주의에 가장 강력히 비판하는 비평가들이 모두 백인들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체와 객체는 공생의 논리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이나 문화 더 나아가 모든 이데올로기까지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 또는 모든 것들 가운데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내 것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절실히 가져야 한다. 60년대 민권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은 서구문학 중심의 전통관에서 주변부에서 항상 소외된 채로 머물러야 했던 제3세계 문학이라는 흙 속에 감춰진 값진 보물을 흔쾌히 발굴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는 곧 우리가 엄격한 중심부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기존의 고정관념이란 틀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큰 전기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문학이나 아프리카 문학 혹은 영미문학에 대한 상호 이해가 전제된다면 보다 생산적이고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었고 또 한 문화권으로 좁혀진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과거 신비평시대 대학교육의 틀 속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한 영문학이나 한국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바탕에서부터 우리는 스스로 경계를 허물고 이를 극복하는 연습을 지금 시작함으로써 25년 이상 지각생이나 다름이 없는 오명을 벗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