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쟁점에 대해 옳은 말 하는 교수들도 정작 학교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걸 보면 신뢰가 안가.” “동의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 선배와의 짤막한 대화. 평소 같으면 나도 쌍수 들고 같이 교수들 뒷담화에 참여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못했다. 학자의 1순위 존재의 이유는 학문이다. 학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아무리 좋은 책을 내고, 신문에 기고도 하고, 탁월한 식견을 보여줘도 한국 사회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대학 교수가 되는 것. 연구원이나 강사로는 부족한 거냐는 질문을 하려 하거든, 얼마 전 작고한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인문한국(HK) 연구교수의 삶을 돌아보자.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남기고도 그는 평생 ‘변방’을 떠돌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그의 ‘불운’한 학문적 여정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모두의 분석이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15일 <한겨레>에 실린 류승완 박사의 인터뷰도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이유 없이 강의를 박탈당하고 1년째 성균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유 박사. 강의가 중단되면서 소속 대학을 잃었고, 도서관 자료 접근도 연구 프로젝트 참여도 모두 불가능해졌다. 공부할 수 없는 학자는 더 이상 학자일 수가 없다. 기사 말 대로 ‘강의 박탈’이 ‘연구 박탈’에 그치지 않고 ‘생존 박탈’까지 이어진 셈이다. 철학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그가 보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랐고, 그 많은 노력의 결과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사람이 견딜 수 있을까. 시간 강사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강의가 중단된 이유를 삼성의 대학 운영에 대한 비판, 성균관대 총장이 주도한 국제학술대회 발표 내용 비판 등에서 찾는다. “비정규직이 된 학자들은 위계질서에 따라 눈치 보며 대학과 자본의 입맛에 맞는 학문을 하기 쉽다.” 그의 말은 왜 교수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비판적 지성’을 용납할 대학은 이 사회에 없다는 뼈저린 폭로다. 그는 그의 학문적 양심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쳤다. ‘그냥 좀 참으시지 않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사회엔 참 ‘그냥 좀 참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초·중·고등학생들은 같은 반 친구들이 당하는 학교 폭력에 침묵하고, 회사원들은 회사 내 불합리한 상황에 침묵하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침묵하고…. 참지 않는 대가가 ‘작은 불이익’ 정도였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참지 않고 하고픈 걸 모두 다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 너무나 소수다. 그리고 그 소수의 다수가 사회적 약자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우리 대신 좀 쓴 소릴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쓴 소리가 조금 명료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깊은 통찰을 담아줬음 좋겠다. 그래야 사람들이 들어 알고, 더 나은 정책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역할에 부합한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류 박사와 같은 지식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학자를 다루는 법은 냉혹하다. 대학원생 장학금은 주류학과가 아니면 박하다. 어찌어찌 졸업을 해도 저임금에 불안정 노동인 강사 생활을 오래 지속해야 한다. 정부가 대학 강사 지위를 보호하겠다며 개정한 고등교육법과 그 시행령조차 오히려 이들의 삶을 더 각박하게 한다. 그 바늘구멍을 지나 교수가 되더라도 임용권을 갖고 있는 사립재단의 눈치를 봐야한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 지성은 갈 길을 잃는다. 대학이 지성인이 우리 사회의 숨구멍이 될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김민경 한겨레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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