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다. 90분 강의를 듣는다 하여도 알아들은 것은 교수의 의례적인 인사말과 전공 관련 몇 개의 고유명사나 문학 관련 전문용어 몇 개가 전부였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긴장해서 강의와 세미나를 참석하고 나면 오히려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독일 친구들을 사귀며, 귀가 뚫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기숙사 공동식당에서는 번갈아 저녁준비를 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엔 한구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날의 피곤을 푸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내게 귀띔을 해주며 내일부터 정기국회가 개최되니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시청하라고 했다. 독일 사정도 아직은 어둡기만 한 나에게 왜 그런 조언을 했을까? 나는 의아해하면서 차라리 뉴스를 열심히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하면서 자신의 진의를 알아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마침 수업이 오후에 있기에 텅 빈 식당에서 텔레비전을 켜고 혼자 앉아 국회 개원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 당 대표자들의 연설을 열심히 경청했다. 교수님이 혼자서 하는 강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제1방송에서 생중계하는 국회개원식은 못 알아듣는 것이야 마찬가지였지만, 연설과 토론으로 이어지는 중계방송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의 유럽은 학생운동 후유증이 남아있었기에, 대학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무정부주의, 극좌파 등의 학생들이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의 식탁 위에 A4용지에 빼곡히 적은 선전물을 가득히 나눠주고 가곤 했다. 식사하면서 무슨 무슨 주의의 학생연합지의 머리기사를 들척이다 보면 식사가 끝났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사진들을 보면서 낯선 독일식 식사를 하듯이 몇 장씩 인쇄된 선전물을 소화불량으로 넘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휘들도 한국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무엇인가 아주 낯설고 과격한 표현이었다. 아마 ‘깨부수자’, ‘뒤엎어버리자’, ‘세상 끝까지’, ‘xxx 같은 놈들’ 같은 어휘들로 기억된다.

국회 생중계를 보면서 다른 세상을 본다는 느낌은, 그렇기에 더욱 신선했다. 바로 그 얼마 전 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 의사당을 찾아가 약속된 시간에 국회의원을 만났던 장면과 오버랩 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국회 라운지에서 만난 그는 나에게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더니, 카운터로 가서 커피 두 잔 값을 치르고 자신이 직접 쟁반에 음료를 들고 와서 면담을 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여당 중진 국회의원이 극동에서 온 유학생에게 직접 커피를 대접하며, 면담에 응해주던 정중한 태도는 초년 유학생이 겪어야 했던 ‘이상한 나라’에서의 놀라움이었던 셈이다.

생중계를 귀를 쫑긋거리며 듣는 순간부터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귀가 뚫리지 않아서였기도 했고, 그 어휘들이 대학교 강의실에서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야 상대방을 존중하며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주요 신문의 사설과 기사들을 스크랩해 와서 인용하면서도 모욕적이거나 비하하는 언어들은 시종일관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숙사 친구가 내게 권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점잖고 절제된 고급 독일어를 배우라고 넌지시 권했던 것이다. 가끔 외국 신문기사의 톱으로 다루어지면서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의 국민을 부끄럽게 하는 우리 국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되새겨진다.

지금 우리 캠퍼스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뒤섞여 여기저기서 낯선 말이 들린다. 과연 어느 고대생이 이들에게 고상하고 품위 있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으면 한국 국회의원들의 연설을 열심히 들으라고 충고해줄 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날까지 학생들 역시 자유, 정의, 진리의 건학 이념에 다져진 호연지기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품위 있는 어휘를 구사하는 고대인들이라는 평을 듣기를 기원한다.

신우균 문과대 교수·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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