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임 여 교수님이 실험실에 파묻혀 산 동안에 바깥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노라고 말을 한 보도가 기억난다. 보수적이라고 자임해도 자신이 ‘保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역사가 발전한 산물이고 그것을 타고 앉은 가운데 지금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보수는 말 그대로 溫故知新의 유연한 사고와 다른 생각에 대해 논리적인 대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보이는 폐쇄사회는 효율적일 것 같지만 전두환정권 말기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은 금강산 댐 소동 예에서 보듯이 낭비를 불러 온다. 지난 40여 년간 민주화운동은 남북관계의 평화적 정착을 위한 몸짓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민주화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갇혀 있던 모든 것을 열어 사회의 총체적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이제 민주화의 긴 여정 위에 선 21세기 한반도의 과제는 식민지시대와 적대적 분단시대로 지내 온 20세기 역사를 지양하여 민주화의 정착, 남북관계의 평화정착. 동북아 평화의 주축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반세기 동안 누적된 적대적 대북관에 따른 역풍도 있어 이제까지 민주화에 역행해 오던 극우집단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인공기를 태우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김정일을 없애고 북한 주민을 구출하자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 모두를 상징하는 국기에 대한 훼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관심두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총련 학생들이 성조기를 불태운 것도 그들의 주장과 다른 차원에서 바르지 않다. 

군복을 입은 반북시위대의 모습과, 무력 준비가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가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교차하면서 가슴이 막혀온다. 적대적 대치에서 비롯된 모든 전상자 가족들에게, 아니 나에게-월남한 아버지가 6ㆍ25 상이군인이셨으니까- 질문을 던져본다. 스러져간 이들의 염원은 끝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전쟁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없게 하는 평화체제일까?

남북교류는 통일국가체제를 논하는 추상 수준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남과 북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평화적 공존과 공영을 모색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발로이다. 북폭과 남폭이 이어져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는 한반도의 오늘과 미래를 위하여 어렵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가자고 노력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퍼주기라는 비난은 현실적으로 북측이 남측에 줄  가시적인 무엇인가가 없다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대적 대치에 따른 제 비용이나 유형 무형의 손실, 이에 반해 평화정착과 각 분야의 확산된 교류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부가가치를 생각한다면 대안 없는 발목잡기는 그야말로 반역사적이고 비생산적이다. 경의선 개통에 따른 경제대동맥은 남과 북 뿐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교류의 범주를 넓혀준다. 이는 한반도의 평화를 국제적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그만큼 튼튼하게 해준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경제교류 영역이 활성화되면 그 자체로서, 대북 관광이 늘어나면 관광의 수요와 공급 면에서 남과 북 모두에게 현실적 이익을 준다. 만물은 변하는 법, 변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자.

평화는 결코 공짜로 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구조적으로 평화가 정착되면 무한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동포애나 민족애 등 정서에 호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면서 함께 산다고 반드시 행복해질까? 부모자식 관계는 그렇겠지만 형제간만 되도 문화적 경제적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은 가족애만으로 덮기 어려워지는 때가 곧 닥치게 마련이다. 평화체제의 정착은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현실적으로 이익을 얻는 계층과 그러한 문화가 남과 북에서 확산될 때 비로소 이를 구조화된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야 계속된 적대적 대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낮아진다. 정몽헌 회장이 자살했을 때 과거와 달리 남북교류가 중단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21세기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 방향은 절박한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