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이 공개되자 한 남자가 아버지의 이름이 사전에 실리는 것에 반발해 법원에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일부에서는 ‘구국의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낸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은 결국 기각됐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참 자주 듣는 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의 주인공은 ‘역사의 판단’을 인정하지 못하고 법원에 <친일인명사전>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남자, 박지만 씨의 누나인 박근혜 후보다. 박 후보의 말은 얼핏 들으면 박 후보가 동생과는 달리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일들에 ‘역사의 판단’이 내려지길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녀의 동생이 한 행동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간 것 같다. 이미 내려진 ‘역사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그녀와 동생이 인정할 만한 ‘역사의 판단’은 도대체 누가, 언제 내릴 판단인가?

수많은 왕들과 정권들이 집권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역사들을 삭제하고 날조했다. 왕조가 교체될 때도, 반정을 일으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그렇게 ‘승리자’들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져’ 왔다. 박 후보가 역사를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박 후보의 모습이 역사를 도구로 생각하는 그 옛날의 ‘승리자’들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박 후보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삭제되고 날조된 기록들 사이에서도 진실을 찾아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예외 없이 현대사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더 이상 ‘승리자’들의 도구도 전유물도 아니다. 역사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옛날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당당하게 그 소신을 밝히는 현장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정말 씁쓸하기 그지없다. 다만 올해 말에, 더 이상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대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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