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 순간’이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이라 생각했던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일은 그동안 평탄하게만 살아온 삶에 큰 오점이라 여겨졌고, 다시는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도 싶었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난 여기서 끝이라고 눈물 짖곤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직면하지 않고 뒷걸음질 치면 평생 도망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그 당시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주저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것 같은 순간이 사실은 발을 헛디뎌 무릎이 까이고 피가 나는 정도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물론, 지금도 ‘그때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하는 아쉬운 맘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일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계기’가 됐다. 그 일을 통해 나름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나’는 무너져 내렸고, 실수할 수 있는 허점 많은 인간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돌아보게 됐고 그 당시 변명하지 않고 오롯이 책임을 진 나 자신이 조금은 대견스럽기도 하다. 고비를 이겨낸 후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었고, 인생의 맛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조직 생활 중 사람과의 관계는 직장인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쯤은 있기 마련. 그 사람과 일할 때는 주고 받는 메일마저 말썽을 부리고, 이런저런 시시비비를 가리는 와중에 서로 오해가 쌓인다. 어느새 마음속에 그 사람을 불편해하는 마음이 싹트고, 얼굴을 마주 대할 일을 가급적 줄이고 싶어진다. 급기야는 그 사람을 피해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관계에 관한 나의 불편한 마음을 직면하고 내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똑같은 문제가 어디서든 반복적으로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편한 관계로 힘든 건 나 자신이다. 내 마음이 어지럽고 평화가 깨지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 싶어진다. 숨 한번 크게 쉰 다음, 마음을 다잡고 불편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문제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근거 없는 우월함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방을 부러워하는 내 마음이었다. 법륜 스님의 말씀대로 경계를 일으킨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온갖 말과 경계에 초연해지지 못하는 내가 문제였던 것이다. 불편한 관계에 관한 내 마음을 직면하고 보니 예전만큼 그 사람이 불편하지 않고 관계가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렵고 불편한 상황이 오면 피하고 싶고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경험이 쌓이면서, 지금 문제를 직면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삶의 굽이굽이 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일찍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항상 이것만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들은 언제나 어려움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운 쪽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지요’

<베르나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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