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다문화’라고 놀려서 학교에 가기 싫어요.”
지난 봄, ‘우리 안의 제노포비아(인종 혐오)’ 관련 기사를 준비하면서 전해들은 다문화 가정 아이의 호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비교적 친숙한 용어로 자리 잡았다고 여긴 ‘다문화’가 아이들 사이에선 차별과 낙인의 언어가 돼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이들을 포용하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다문화란 말. 그러나 아름다운 말은 현실의 아픔을 가릴 수 없었다.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상처받고 있었다.

최근에는 러시아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고등학생이 잇따라 불을 지른 혐의로 검거되기도 했다. 원인은 학교 친구들의 끝없는 놀림에 있었다. ‘눈에 띄는’ 외모를 비하하는 갖가지 욕설에 견디다 못한 아이는 방화에서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 남은 ‘다문화 가정’이란 낙인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달 다문화 가정 초·중·고교 학생이 2년 뒤 전체 1%에 이를 거라고 내다봤다. 이들 학생이 지난해 4만 6000여명으로 5년 새 다섯 배가 됐다는 통계도 발표됐다. 중고등학생 숫자와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했다. 법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한 명, 두 명 어엿한 성인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단 의미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문제라고 여겼던 다문화 사회 교육 문제가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정규교육 과정을 마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성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곳은 대개 대학 캠퍼스가 될 것이다. 적잖은 아이들은 교실에서 받은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 상태로 고등학교 문을 나설 터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들이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을까. 솔직히 의문이다. 요즘 부쩍 중시되고 있는 ‘국제화’ 지표가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들이 어느 정도 외면적 다양성을 확보한 건 사실이다. 이제 캠퍼스 곳곳에서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들이 쓰는 언어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양하다. 더 이상 한국인 학생들도 외국인 학생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 대학이 ‘다문화 사회'에 충분한 준비가 돼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외국인 학생 유치처럼 눈에 보이는 지표로 국제화를 추진해온 대학들로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된 셈이다. 쉽게 측정할 수 없는 ‘조화’, ‘다양성’이 장기적으로 대학 사회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성장은 한국 대학에서 다양성이 어떤 의미였는지 가감 없이 드러낼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차별의 언어로 전락한 ‘다문화’란 말이 보여주듯, 내실 없는 준비로 이들을 맞이하면 캠퍼스는 또 하나의 상처가 되고 말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안의 타인’이라는 편견과 차별로 상처받으며 자라온 아이들. 이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성장시킬지에 한국 대학의 미래가 달렸다고 보는 건 지나친 예측일까.

매일경제신문 사회부 윤재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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