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에선 투표시간 연장을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자신의 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판을 짜기 위한 속셈이다. 일단 그림은 민주당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민주당이 비록 “야권 성향을 가진 젊은 층의 투표율을 높이겠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투표율을 높이겠다는 행동 자체엔 당위성이 부여됐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선거철만 되면 여론의 관심이 투표율에 쏠리기 시작했다. 연예인, 작가 등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투표 인증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일정 투표율을 조건으로 이색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든다. 물론 투표를 장려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다. 높은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정치에 대한 관심의 표시다. 하지만 19대 총선에서 벌여진 일련의 캠페인은 투표의 ‘질적 팽창’보단 ‘양적 팽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SNS나 시민운동에선 투표하자는 말만 외쳐댈 뿐 ‘공보물 꼼꼼하게 읽어보기’나 ‘후보자의 경력 및 공약 검토해보기’ 같은 내용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저버릴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을 어르고 달래 투표장에 세운다 한들 과연 현명한 선택이 나올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투표는 중요하면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사회적 분위기에 휘둘려 투표장에 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2004년 17대 총선당시 정동영 후보는 이른바 ‘노인폄하’발언으로 곤욕을 치른바 있다. 수십년째 특정 정당에 대한 고집적인 지지를 보이는 계층을 겨냥한 말이다. 그 당시 정후보의 발언을 접했을 땐,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끌어온 노인분들을 비하한다는 생각에 불쾌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들의 투표가 ‘양적 팽창’에는 기여했을지언정 ‘질적 팽창’에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곧 있으면 새롭게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18대대통령선거가 열린다. 이번 대선에선 유권자들을 향해 투표장으로 가라고 윽박지르는 ‘양적 팽창’보단 스스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투표장으로 향할 수 있는 ‘질적 팽창’의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한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