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신문은 매주 수 많은 사람을 만난다. 교수, 교직원, 학생등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중에서도 학내외에 큰 이슈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대신문이 창간기념을 맞아 과거 고대신문에 보도돼 이슈가 됐던 학우 네명(조미덥(정경대 경제00), 서범진(문과대 철학02), 이일재(정경대 경제08), (간호대 간호05))을 만나봤다.

▲ 조미덥(정경대 경제00) 씨
2003년 8월 7일 한·미 연합훈련을 반대하는 시위가 포천 연평리에서 벌어졌다. 당시 정경대 학생회장이었던 조미덥씨는 이로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의정부경찰서에서 진행하다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았고, 이 사건은 고대신문 1458호(2003년 9월 1일)에 보도됐다. 조미덥 씨는 현재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다.

-출소 후 어떻게 지냈나. 학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는가
“출소 후에는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 복학한 이후에는 학점도 채우고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당시 시위로 구속영장이 신청됐는데, 시위 참여에 대한 후회는 없나
“사실 구속영장이 나왔을 때 좀 놀랐다. 중대한 사안은 아니었는데 당시 정경대 학생회장이라 주동자로 보였던 것 같디. 시위에 참여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지만 학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다. 정경관 리모델링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구속됐는데, 회장으로서 맡은 바를 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수감생활은 어땠나
“1개월 좀 넘게 수감돼 있었다. 구치소에도 서열이나 규율이 존재해서 처음엔 적응을 잘 못했는데 곧 안정을 찾게 되더라. 결과적으로 보면 제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현재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학생운동의 경험이 직업선택에 영향을 준 것인가
“직업 선택에는 3가지 유형 있는 것 같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여가가 많은 직업,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직업. 난 세 번째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공익성으로 귀결됐으면 해서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많은 모순들이 생겼는데 학창시절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이 모순을 풀어내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요즘에는 대학생 1학년이 고등학생 4학년 같다. 마치 고등학생처럼 커리큘럼이 정해진 채 살고 있다고 할까. 당장 주어진 것에 쫓기지 말고 인생을 길게 봤으면 한다. 아무리 요즘 대학생들이 힘들다고 해도 분명 고민할 시간은 있다. 책도 많이 읽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도 해봤으면 한다”

▲ 서범진(문과대 철학02) 씨
서범진 씨는 당시 교수감금사태로 화제가 돼 출교된 7명의 출교생 중 한명이다. 2008년 3월 복교 판결로 학교로 돌아온 서범진씨는 1584호(2008년 4월 6일자)에 보도됐다. 현재 그는 현재 경희대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있다.

-보도된 인터뷰 기사를 읽어봤나.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그때 바로 읽어 봤는데 옛날이라 기억은 잘 안난다. 학우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주위 도와준 친구들은 훈훈하다, 일반 학우들은 그래도 돌아왔으니 잘됐다, 고파스에서는 ‘고대신문에서 할 거 없냐, 왜 출교생 취재하냐’고 하더라.”

-현재 경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데, 본교가 아닌 경희대로 진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먼저 제가 배우고 싶은 분야였던 ‘미국사’에 정통한 교수님이 경희대에 계셨다. 인격적으로 훌륭하시고 권위주의적 태도가 없으셔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려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싶은 마음도 있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두 군데 원서를 넣었는데, 경희대만 붙었다. 실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학교 측과의 문제 때문에 어려웠을 수도 있고, 또 그 문제를 극복할 만큼 제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죠”

-left21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2008년 3월 복교 후 2009년도 까지 left21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들어가 주류언론에서 다루지 못하는 부분들을 다뤘다.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자세히 다루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선배들이 권해주셔서 결정하게 됐다”

-돌이켜보니 당시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더 효과적으로 연대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우리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했다. 그리고 당시 지지해주던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게 됐다.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주장했던 것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관철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혹시 정치를 염두해 두고 있나
“일단 공부를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공부만하는 사람은 싫고 노엄 촘스키처럼 강단에 서서 강연도 하고 민중들과 만나 다양한 얘기를 나누는 사회운동가가 되고 싶다. 정치라는 게 정당에 들어가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정치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제가 1,2 학년 때랑 달리 현재의 1,2학년들은 많이 힘들어 보인다.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너무 팍팍하게 살고 있는 것 같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으로서 위로를 하고 싶다. 동시에 위로만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팍팍한 거다. 서로를 다잡고 그 물음을 나 자신이 아니라 이 사회에 던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많은 후배님들이 그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 이일재(정경대 경제08) 씨
1990년 2월생인 이일재씨는 2010년도 외무고시 최연소 합격자로 고대신문 1647호(2010년 7월 17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그는 “처음엔 몰랐지만 친구를 통해 고대신문에 보도된 걸 알았다”고 말했다. 1년의 유예기간을 보내고 학교를 졸업한 이일재 씨는 현재 외교관으로 근무 중이다.

-보도 후 어떻게 지냈나. 고시 합격자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1년간 유예기간을 보내고 작년 8월에 입사했다. 유예기간은 고시생들에게 황금의 시기로 여겨지는데 나는 생산적으로 보내지는 못했다. 유예기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고시합격자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 대우가 달라지고 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 편히 다닌 건 있지 않겠냐. 그런데 처음 세 달이 지나니까 빨리 일을 하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어졌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
“다양한 경험을 빨리 경험하는 게 좋았다. 처음에 적응하는 것이 좀 어려웠지만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 일을 하게 된다. 어리다고 일을 안 시키는 것도 아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국제기구국 산하 군축비확산과에서 일하고 있다. 군사에 대한 이해가 외교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와 재래식 무기의 군비를 축소하는 업무를 하는 곳인데, 저는 방산물자 등의 수출규제와 재래식 무기와 외기권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막내가 주로 담당하는 업무인 행정, 예산 업무도 담당한다”

-앞으로의 목표는
“어느 한 분야에서 정통한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나라는 한 명의 외교관이 여러 가지 이슈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력이 풍부한 국가의 경우에는 한 외교관 당 하나의 이슈가 배정돼 전문성이 저희보다 훨씬 뛰어나다. 예를 들어 통상이슈 담당 외교관은 경제학자 같고 군축담당 외교관은 기술자 같다. 업무적으로 봤을 때 이런 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Specialized Generalist’가 되는 게 목표다. 여러 분야를 담당하되 어느 한 분야에서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싶다”

▲ 채정훈(간호대 간호05) 씨
건국대 축산학과 중퇴, 연세대 화학과 졸업, 화학 교사 퇴직 후 본교 간호대 입학...
고대신문 1575호(2007년 11월 25일자)에 독특한 이력으로 보도됐던 전 간호대 학생회장 채정훈 씨는 현재 본교 병원의 3년차 간호사다.

-기사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제 얘기를 잘 해준 것 같아 고마웠고 당시 과외하는 학생들이 신기해했다”

-보도 후 어떻게 지냈나
“대학 4학년 때 만난 아내와 2009년 12월 17일에 결혼했다. 2차 졸업시험 날이었는데 시험을 끝마치고 결혼식장으로 가서 식을 올렸다. 지금은 고대병원 심혈관센터에서 부정맥 전담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간호대에 진학하셨다. 간호사로서 생업에 뛰어들어보니 후회한 적은 없나
“간호사란 직업이 생각보다 너무 힘든 직업이라 후회하기도 한다. 학생을 가르칠 땐 정말 돈을 쉽게 벌었었던 것 같다. 간호사로서 첫 월급을 받는 날 아내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생명을 다루고 있는 직업이고 주위의 반대를 어렵게 뿌리치고 택한 길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저번 기사에서 노인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사실 기사에서 생략되긴 했는데, 간호대에 진학한건 뇌졸중으로 아버지께서 편찮으셨던 영향이 컸다. 그래서 재활간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호스피스 쪽으로 진로를 잡으려고 재활병원에 자리를 알아봤는데 나이 때문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길이 많이 달라졌죠다

-2007년 인터뷰 당시가 36세, 지금은 불혹을 넘긴 나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1월 5일에 둘째가 태어나는데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있으면서 학업을 중단한 어린 환자들이 많은데, 이런 친구들을 위해 병원 학교를 운영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간호사를 퇴직한 후에는 다시 한 번 교사로 돌아가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할아버지 교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

-남자로서 쉽지 않은 길을 택하셨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저는 제 고민을 충분히 고민해봤나 사실 후회가 된다. 3번 정도는 고민해 보고 결정한 사항은 밀어붙여라. 밀어붙이되 결정에 대해서는 투정하지 말고. 그리고 선택에 있어 책임질 수 있게 경제적 독립은 전제돼야 한다. 후배 여러분들이 가시는 멋진 길 여유롭게 사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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