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념]우리는 아직_소설부문 우수작
[창간기념]우리는 아직_소설부문 우수작
  • 고대신문
  • 승인 2012.10.29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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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문 창간 65주년 기념 문예작품 현상공모

 

▲ 최다희 전문기자
 나는 우리의 관계가 구체적인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입으로 내어 말하지 않은 건 내가 너무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도를 넘어선 신중함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고, 나는 도무지 너를 읽을 수 없었다.
  네 볼은 햇빛에 비춘 눈꺼풀과 같이 가느다란 실핏줄들이 피부 표면 가까이 엉겨있었다. 보통은 그게 딱 보기 좋을 정도로만 눈에 들었지만 찬 곳에 오래 있으면 양 볼이 거무죽죽하게 부어, 유리창에 낀 성에를 그대로 떼어와 얼굴에 붙여놓은 것같이 보였다.
 너는 정적인 움직임으로 나를 쳐다보고, 내 손을 잡고, 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놀렸다. 네가 내 가까이 있을 때마다 난 반쯤은 들뜨고 반쯤은 미쳐버린 이상한 기분으로 숨을 죽였다. 난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나의 그 기쁨을 네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럴수록 내 입술은 주어와 목적어, 또는 서술의 대상이 요상하게 변해버린 두억시니 같은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나는 네 앞에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반 독백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너는 그런 나를 간단한 추임새 하나로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가버리지도 않았다. 너는 성에 낀 볼과 짧은 속눈썹, 덜 여문 여드름과 긴 교복 치마, 깨물어 사선으로 변해버린 손톱과 뒤축이 닳은 메리제인 구두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너의 침묵과 보일 듯 말 듯 한 끄덕임에 반해버린 나는 처음 외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처럼 전혀 다른 세상의 너를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다 내가 기초적인 문법체계와 간단한 어휘 몇 개를 배우고, 마침내 내 마음을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대강의 준비를 마쳤을 때, 아무런 예고나 조짐, 심지어는 간단한 불쾌함의 표현도 없이 너는 모든 언어구조를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생소한 체계로 바꿔버렸다. 나는 이전과 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지만 알게 모르게 처진 점액질의 막이 너와 나 사이를 미끄러져 어긋나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이전에 너를 알고자 했을 때 보였던 것과 같은 노력으로 변해버린, 혹은 변하지 않은 너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떠한 수확도 없었다. 너는 전과 같은 동작으로 공원을 산책했고 소설의 책장을 넘겼다. 차라리 네 창백한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개지거나 네 팔이 부러져 두 동강이 났더라면 나는 너의 그런 변화를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겉보기엔 어느 것 하나 바뀐 게 없었다. 그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네가 나를 불편해한다고 느낀 후로부터 나는 내가 너를 혹 짜증나게 하는 게 아닐까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너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나는 전보다 한 발짝 떨어져, 그러나 여전히 네 주위를 서성였다. 네가 잠깐 토라져 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까지 나는 계속 부질없는 희망으로 네게 다가가 서늘한 상처를 입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행동을 반복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갑자기 날 싫어하게 될 리가 없었다. 너는 내게 있어 완벽에 가까운, 아니 완벽한 상대였는데 너에게 있어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밀어내면서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내 결점을 하나하나 헤아려 짚어 봤다. 딱히 무언가 때문이라고 하기엔 난 결점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이전까지는 이 결점들을 모두 받아줬던 걸까? 어제까진 이것들 모두 합해서 내가 좋았는데, 오늘은 갑자기 싫어진 걸까? 아무런 이유도 계기도 없이?
 그래,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싫어질 수도 있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날 다시 좋아해 줄 조짐을 보이지 않는 너를 떠나는 건 논리적인 이성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너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용기조차 잃어버린 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너 요즘 화났냐고, 아니면 갑자기 내가 싫어진 거냐고 사뭇 대담하기까지 한 문자를. 몇 분 후 핸드폰이 울었다.
 [미안.]
 여기서 나는 숨을 잠시 멈췄다.
 [내가 요즘 좀 피곤해서 그래. 나는 오히려 네가 화난 줄 알았어. 아니라니 다행이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웃는 얼굴로 만나.]
 상냥한 답장을 받고 나는 핸드폰 액정을 잡고 침대 위에서 행복감으로 뒹굴었다. 주말동안 나는 조증에 걸린 치와와처럼 발발거리며 너는 왜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만날 수가 없는 걸까 답답해했다. 드디어 월요일이 오자 나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머리를 감고 로션을 발랐다. 무딘 교복 안에서는 어떻게 꾸미나 모두 똑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네게 조금이라도 더 곱게 보이고 싶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그리고 지난 2주 동안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울었다.

 

 선화는 그전부터 우리와,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을 대하는 것만큼 선화에게 상냥하지 못했다. 우스운 질투 때문이었다. 나는 그 애를 쌀쌀맞게 대하는 내가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학교 앞 카페에 앉아 답이 뜸한 네게 선화를 종종 욕했다. 선화가 그 알량한 성적으로 얼마나 잘난 체를 하는지, 왼쪽으로 살짝 비틀린 그 애의 코가 얼굴의 반을 가리는 빨간 뿔테 안경과 얼마나 대단한 부조화를 이루는지, 선화의 성급함과 미성숙함, 우리와 같이 다니고 싶어 하면서도 밖에선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애들이라고 말하는 그 위선을 나는 욕하고, 너는 듣다가, 몇 마디 동조해주고는 마끼아또 위에 뜬 거품을 핥았다. 그러고 나면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가, 선화에게 미안해져 내일은 인사라도 상냥히 받아줘야지 생각하고는, 그 생각을 결코 실천으로 옮기진 않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울면서 나는 잔뜩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게 무언지 모른다. 그런데 그걸 알지 못하면 넌 계속 내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네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내 뺨을 피가 맺히도록 갈겨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면 넌 차라리 미안한 마음에라도 내 사과를 받아줄 텐데. 너는 내 긴 머리채를 붙잡고 흔드는 대신 끊임없는 내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짧은 답변만을 내놓았다. 이전에도 너는 말이 없었지만 그 때의 그래. 와 지금의 그래. 는 달랐다. 같은 상황,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이 같은 단어를 말했는데도 난 그 사이의 차이를 느꼈다. 그 간격이 커질수록 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너는 더욱 말이 없었다.


 네가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어지자 그 정적을 메우기 시작한 건 선화였다. 난 전처럼 선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달며 그 애를 원래 제 무리로 되돌려 보낼 기운이 없었고 넌 언제나처럼 그냥 듣기만 했다. 나의 침묵을 선화는 호의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선화는 나와 네 사이에 눈알에 묻은 속눈썹같이 붙어서는 나를 자꾸 따끔거리게 했다.
 선화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대화가 끊기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같이 떠들었다. 선화의 그 의미 없는, 그러나 경쾌한 지껄임들. 그것들은 느린 박자의 우리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영원히 멈춰버리진 않게 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선화가 싫었지만 전보다는 그 애의 말을 덜 끊고, 대신 너를 더 많이 힐끔거렸다. 우리의 눈길이 마주치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너는 이내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나는 너의 무심한 눈길 하나에도 상처를 받으며 내 잘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더 노력할 뿐이었다.
 내가 보냈던 그 문자 이후로 나는 다시 네게 왜 이러느냐고 묻지 못했다. 네가 다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며 평소처럼 굴 것 같았다. 그 ‘평소’라는 것이 언제부터 네가 날 외면하는 것으로 변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졌고 담임은 무슨 일 있느냐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네 얼굴을 떠올렸지만 그걸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내가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다고 하자 담임은 체력관리를 잘하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네 쪽을 흘끔거렸지만 너는 그 무심한 눈길조차 내게 돌리지 않았다.
 
 나는 책상 위에 종합영어 대신 일기장을 펴놓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가 어딘가 변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날 하루 동안 받았던 상처를 모두 떠올리고 다시금 곱씹는 건 너무 아팠다. 나는 너를 처음 봤던 날부터의 일기장들을 다시 읽었다. 거기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쓰여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엔 네가 있었다. 거기 있는 동안 나는 너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부질없는 희망만 잔뜩 품었다 또 버리기를 반복했다. 네가 다시 내게 상냥해질지 모른다는 희망은 무궁화처럼 매일 피고지기를 반복했지만 내 희망은 꽃같이 고울 수 없었고 비참하게 시든 송이들만 칙칙하게 쌓여갔다. 책상 앞에서,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도 30분이 더 걸리는 학원에 가는 길에 나는 일기를 꼼꼼히 분석하며 나의 잘못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학원에는 도시 반대편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애들밖에 없었고 그 애들은 자기들끼리 놀았다. 짧은 쉬는 시간과 저녁시간에도 나는 일기를 읽었다. 이름만 알고 지내던 남자애가 넌 무슨 노트를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읽느냐고 물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 애 또한 학교 숙제라는 내 대답에 석연찮은 표정을 하고서도 별 말 않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여름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마지막 일기장을 반 쯤 읽고 있었고 허리춤이 흘러내려 치마를 줄여야 했다. 나는 정말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고 다들 내가 수능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다. 너는 언제나처럼 그랬고 나는 아무 때고 자꾸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돌봐주는 게 차라리 선화였단 건 정말 웃기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 선화가 사실은 정말 못된 애는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 애는 아직도 너와 나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주전부리를 건네고 내가 아프진 않은지 물어보는 선화를 좋아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점점 고립 되어감을 느꼈다. 공기는 축축했고 날은 끈적거렸다. 난 해야 할 게 많았고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너만 바라보다 하루가 가버리는 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네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세상이 나를 무시했고 난 열패감에 짓눌려 조금 더 우울해졌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들 내게 조금 더 빨리 걸을 것을 재촉했다. 선화가 너는 수시로 어느 대학을 칠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전엔 너와 함께하는 대학 생활을 꿈꿨는데 지금은 그게 옳은 건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건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학원에서도 나는 계속 네 생각에 멍했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외로워 보였지만 거기엔 네가 없었고 눈앞에서 목 아래를 누르는 듯한 답답함도 조금은 덜했다. 그러나 그게 덜하다고 해서 행복하진 않았다. 나는 일기를 읽으면 부주의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 사이의 균열이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믿음은 틀렸고 나는 여전히 네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저녁시간이었고 학원 아이들은 밥을 먹으러 주변의 번화가로 모두 나가 있었다. 나는 혼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일기장을 다시 한 번 뒤적거려 보았다. 헤드셋 속에서 담담한 목소리의 보컬이 노래했다. 안된다고,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다고.
 일기장엔 그저 행복하단 얘기들뿐이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네 이름이 보였다. 헤드셋 밖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 과제 아직도 안 끝났어? 참 길기도 하다.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흠칫했다. 그 바람에 일기장이 바닥에 떨어진 건 단순한 사고였다. 바인더링은 열려있었고 백 쪽이 넘는 일기들이 엉망으로 헤지러졌다. 이정우는 학원 주변의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와는 이름만 아는 사이였다. 그런 애가 바로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음악을 너무 크게 듣고 있어 교실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정우는 당황해서는 그 작은 아수라장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했다.
 미안, 놀랠 생각은 없었는데. 아, 어쩌지.
 나는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일기장엔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정우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급하게 일기를 줍고 있었다. 내가 그 애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거칠게 뺏어들자 정우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정우는 자꾸 나를 도와주려 했다. 나는 정우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쟤가 방금 이것들을 읽었을까, 안 읽었을까. 나는 머리가 복잡했고 그 상황이 짜증나고 싫었다.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돼?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순서가 어그러지던 종이가 구겨지던 상관 않고 바닥에 있던 것들을 모두 가방에 쑤셔 넣고 지퍼를 잠궜다. 내가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씩씩대며 자리에 앉자 정우는 다시 사과했다. 나는 숨을 조금 가라앉히고 괜찮다고,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다. 내가 울 것같이 보였는지 정우는 다음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너의 친구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너와 5년을 알고 지냈는데 자기는 네가 웃는 걸 딱 한 번 봤다고. 중학교 체육대회 날이었고, 너와 그 아이의 반이 우승을 했고, 네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기쁘게 웃었고, 그게 그냥 끝이었다고 했다. 네 친구의 기억에서 너는 그냥 말 없이 교회 열심히 다니는 선교부장이었다. 내가 너는 고등학교에 와서는 다다 웃는다고 말하자 네 친구는 웃어 넘겼다. 하, 많이 바뀌었나보네. 믿는 것 같진 않은 눈치였다.
 나는 한번도 너희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너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집에 남을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나는 아쉬웠지만 참았다. 너와 같이 작년 봄에 예술의 전당에서 빈 소년 합창단 내한 공연을 봤을 때 너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집이 근처라고 하면서 714번 버스, 배차 간격이 끔찍하게 긴 그 버스를 같이 기다려 주었다. 그날 하루는 정말 세상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늦은 4월, 바람은 선선했고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입장이 시작되기 전 너와 돌아다니다 편의점에서 산 신제품 메론맛 초콜릿은 맛이 별로였지만 얼굴을 찡그리는 나를 보고 너는 웃었다. 나는 감히 네 손을 먼저 잡진 못했지만 너와 가까이 붙어서 걸었고, 가끔은 팔짱도 꼈다. 매 순간순간이 비눗방울처럼 아롱아롱 대며 내 정신을 빼놓았다. 버스 창가에서 등을 돌려 걸어가는 너를 보면서 나는 네게 거듭 반해버린 나를 발견했다. 다음에 같이 사라 문 사진전을 보러갔을 때도 너는 다른 세상의 사람답게 하루 내내 내 정신을 홀딱 빼놓고는 버스 정류장에서 새침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네가 사는 그 동네는 내가 아침마다 걷는 투박한 매일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다.
 그런 동네에 선화도 살고 있다는 건 무릉도원에 세워진 복숭아 통조림 공장 같은 사실이었다. 6월 모의고사를 보고 나서부터 너와 선화는 매일 함께 등교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예전부터도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나는 그 사실을 그 때야 알았다. 선화는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그 애가 까르르 웃는 소리는 내게 득의양양한 비웃음으로만 들렸고 나는 진짜 연적을 대하듯이 선화를 정말로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딘가 변해버렸던 날과 달리 그 날은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는 동안 생리가 터졌고 속옷을 빨고 침대 시트를 내놓느라 평소보다 10분 늦게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초여름 아침답지 않게 공기는 끈적거렸고 나는 자꾸 땀을 흘렸다. 앞도 보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는데 건널목 께에서 여자애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선화가 보였다. 그 옆에는 네가 있었다.
 선화는 계속 떠들었고 너는 거기에 추임새를 넣고 선화의 웃기지도 않은 말들에 킥킥댔다. 목소리만으로는 그게 너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않던 그 네가 정말 지금 선화 옆을 걷고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너는 웃음기 띤 얼굴로 선화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무얼 말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겐 웃지 않던 네가 선화를 보고는 웃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너는 내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너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너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선화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네가 조용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안녕.
 나는 차라리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별 수 없이 선화를 사이에 두고 너와 나란히 학교까지 걸어갔다. 나는 나 자신을 하찮고 불쌍하게 만드는 취미가 없었다. 그런데 너는 자꾸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선화는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고 웃었다.
 내 낌새가 좋지 않은 걸 알았는지 선화는 어떻게든 내 기분을 띄워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 애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선화는 여전히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뱅뱅 돌았다. 나는 그게 나를 죄책감으로 눌러 죽이려는 수작처럼 느껴졌다. 내가 처한 상황이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가 났는데 내 그 모든 분노를 받아 마땅할 대상이 없었다.
 선화는 나를 웃기려고 했다. 웃기려고 꺼낸 이야기가 너희 집 강아지가 그 애 치마에 오줌을 지렸단 이야기인 게 문제였다. 나는 선화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는 원래 남을 집에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네가 선화를 집에 데려와 같이 놀았다는 얘기는 다 거짓말이라고. 다 거짓말이고 너는 지금 잠시 피곤해서 입을 다문거지 나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고. 김선화 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견고하다고. 나는 그런 거짓말들을 외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교생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네가 그 순간 일어나 선화에게 같이 교무실에 내려가자고 한 게 정말 우연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와 선화가 교실에서 나가고 다른 아이들은 참고서에 코를 박고 각자 무언가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나는 내가 웃겼다. 웃음이 나와 그걸 참으려고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오전 내내 수업을 흘리면서 나는 계속 생각을 해봤다. 여태까지 생각해왔던 것들을 다시금 곱씹었다. 선화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른 애들은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우리가 싸워서 내가 너를 아주 많이 미워하는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크게 싸운 사이라도 우리 같이는 않았다. 그때껏 일어난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원하지 않았다.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너는 그걸 원했다. 네가 정말 그런 것들을 바랐는지, 아니면 정말 그냥 ‘좀 피곤한’ 게 이렇게나 오래 가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점심종이 치고도 나는 계속 엎드려 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고 나는 생각을 더 해야 했다. 선화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아플수록 배에 뭘 채워줘야 하는 거라고. 선화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상냥하게 웃어주는 선화가 그렇게 말했다.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나는 진저리를 치며 어깨에서 선화의 손을 맵게 쳐냈다. 거의 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명에 가까운 내 고함에 선화가 흠칫했다. 아니, 난 그냥 밥 먹으러 가자는 뜻이었어.... 웬만해선 주눅 드는 일이 없는 애가 말꼬리를 흘리며 우물쭈물거렸다.
 너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내가 뒹구는 이 거지같은 상황이 가득 담겼다. 나는 네 눈빛이 싫었고 이 상황이 싫었고 말이 없는 네가 슬펐다. 가득 차오른 감정이 내 온 몸을 쥐고 흔들었다. 나는 그 거친 흔들림에 꽉 붙잡혀 되는 대로, 나오는 대로 고함치고 욕하고 지껄였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내버려 둬.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날 이렇게 못살게 굴어.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데. 도대체 왜, 왜, 왜, 왜 어째서 너는 나한테 이래. 네가 나한테 이래. 나 좀 제발 내버려 두라고, 제발 좀 내버려 둬 달라고.
 나는 거의 울고 있었고 그건 선화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우리 밥 먹고 올게. 선화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꼭 깨물고 걸어 나갔고 너는 그 애를 느린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 때까지 교실에 남아있던 다른 애들은 놀란 얼굴로 날 보다 식당으로 내려가 버렸다. 교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훌쩍대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몇 분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교실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네가 보였다. 너는 내가 앉은 교실 뒤켠으로 걸어 왔다. 나는 너를 보고 있었고 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네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달싹거렸다. 나는 눈물로 얼룩져 새빨개진 얼굴로도 바보같이 설렜다.
 네가 내 앞까지 왔다. 나는 네가 할 말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시간의 꽁무니를 잡은 듯 우리가 멈춰 있다고 느꼈다. 나는 네가 할 말을 기다렸다. 기대에 찬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나는 너를 보았다.
 그러나 너는 나를 지나쳤다. 너는 내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을 뿐이었다. 그건 아무 이유 없는 변덕이었다. 너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물함 자물쇠가 달칵거리고 네가 책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참고서를 들고는 다시 나갔다.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날 쳐다봤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어째서 선화를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갔던 네가 10분도 안 되어 고작 사회문화 참고서를 가지러 교실까지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위로하거나 내게 사과하러 왔던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너는 평소와 같이 나를 하찮게 만들었다. 오늘은 그 정도가 약간 더 심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울며 가방을 싸고 휴대폰을 챙겨 학교 밖으로 나갔다. 수위 아저씨는 코가 빨개지도록 우는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버스에서도 훌쩍임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집에 와서도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아프다고, 너무 많이 아파서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고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긋난 걸까. 내가 몇 달 동안 붙잡고 늘어졌던 질문이었다. 나는 백지 위에 글씨가 떠오르길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네가 밉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래. 너는. 나는 그만두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너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어쩌면 난 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린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멍했다. 일어나 화장실에 가 거울을 보았다. 울다 자서 얼굴이 부어 있었다. 멍청해 보였다. 생리대를 갈고 다시 침대에 가 누웠다. 아랫배가 싸하니 아팠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샤워를 하면서 다시 거울을 보았다. 정말 그만 둬야겠다고 내가 말했다.

 월요일에 나는 선화에게 사과했다. 선화는 자기가 더 미안하다며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옆에 서 있던 네게 싱긋 웃으려 했다. 미소보다는 입꼬리를 뒤트는 행동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래도 성공적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내가 다른 애들 사이에 끼어 밥을 먹자 선화는 아직도 화가 난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내가 말하자 선화는 이해하지 못했다. 네 주위를 맴도는 걸 그만두자 시간이 많아졌다. 좀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날 받아주는 대학도 있겠다 싶었다. 당연히 너는 내 변화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보였다는 게 조금 더 확실해졌다. 일기장은 차마 버릴 수 없어 종이상자에 담아 베란다 창고에 내놓았다. 이제 나는 책상 앞에서 일기를 읽는 대신 문제집을 풀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멍하니 네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네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개새끼가 아니라고. 나는 충분히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너만 그걸 몰랐다. 너는 그냥 예외였고, 예외는 그냥 예외로 내버려두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몰라 거의 반년이 되도록 혼자 질질 짰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한심할 뿐이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 올랐다. 담임은 이대로만 하라고 말했다. 이대로만 해서는 모자라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참고서를 넘기고 공식을 외웠다. 학원 아이들과는 여전히 교류가 없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는 구석에 앉아 단어를 외웠다. 여름이 한창이었고, 어차피 다들 급했기 때문에 내가 눈에 띄게 이상해보이진 않았다.
 토요일 오후 수업이었다. 때가 때인 만큼 수업은 문제풀이 위주로 이어졌다. 칠판 위의 판서를 바쁘게 베끼다 샤프심이 떨어졌다. 가방을 뒤적이다 구겨진 종이뭉치가 손에 닿았다. 무언가 해서 폈더니 예전에 쓴 일기였다.

 한 달하고도 보름 넘게 나는 네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학교에서 너를 볼 때도 싫어하는 애를 만난 것처럼 횅하니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아둔하게 네 뒤만 따라다닐 때의 내가 지금 그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었다. 당장 구겨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수업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너보다 중요한 게 많은데. 해야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너 같은 애한테 매여 있기에 나는 너무 아까운 사람인데. 그런데 왜 나는. 너는. 우리는. 정우가 나를 보고 외쳤다. 선생님 얘 울어요. 판서가 멈추고 교실 안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나는 울음을 참으려 꺽꺽거리며 변명했다.
 잠에서 깨려고 혀를 깨물었는데 너무 아파요. 너무너무 아파요.
 선생님은 내게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닦고 오라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저녁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교실로 돌아갔을 땐 바람대로 모두 나가고 없었다. 정우만 혼자 거기 앉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내가 가방을 매고 나가자 정우가 뒤따라왔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자 정우가 멋쩍게 말했다. 밥 좀 같이 먹어줘.
  해는 졌지만 여름이 한창이라 날은 아직 푸르스름하게 밝았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나무젓가락을 뜯어 면을 뒤적거리다 정우가 물었다.
 너 무슨 문제 있지. 조금 오래 된.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우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정우가 더 이상 묻지 않자 나는 조금씩 말이 나왔다. 별로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 그냥 제멋대로 흘렀다. 내가 누굴 좋아했어. 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르고 있어 그 속에서 제 스스로 웅크리고 작아진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우는 어차피 너를 몰랐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름뿐이었다. 정우는 다음부터 안 보면 그만일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편하게 말이 나왔다.
 이야기가 끝나자 정우는 다 먹은 컵을 버리러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다시 벤치에 앉은 그 애에게 나를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정우는 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개찰구를 지나기 직전 정우가 물었다. 학원 계속 나올 거지?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다 겨우 그래. 라고 웅얼거렸다. 정우는 그거면 됐다는 듯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계속 흔들리지 않는 척 네 앞에서 의연했다. 주말에는 학원에 가 정우와 같이 밥을 먹었다. 나는 남들에게 하지 못했던 네 얘기들을 속이 텅 빌 때까지 말했다. 정우는 너는 왜 그러냐고 하거나 이상한 계집애라고 날 욕하지 않았다. 그냥 듣기만 하고, 가끔씩 위로를 해줬다. 나는 정우에게 넌 왜 내 말을 들어주냐고 물었다. 정우는 자기는 정신과 의사가 꿈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건 정신병이 아니라며 화냈다. 정우는 안다고, 하지만 지금 마음이 아린 건 맞지 않느냐 물었다. 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정우에게 네 얘기를 했다.
 지금은 힘든 게 정상이니까 괜찮다는 생각도 가끔씩 들어. 끝내도 끝나지 않는 건 답답하긴 하지만.
 나는 네 주위를 맴도는 대신 아주 가끔씩만 너를 훔쳐봤다. 네 볼은 여전히 실핏줄이 엉겨있었고 창백했다. 이제 우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내 눈에 너는 항상 예뻤다.
 
 수능이 끝나고 수시에 붙은 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재수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너를 훔쳐보는 게 습관이 된 것처럼 정우와 이야기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있었다. 너를 보지 못하자 너에 대해 이야기할 것도 조금씩 줄어들었고 그제야 우리는 너 이외의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정우는 나에게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고백을 하라고. 경멸받더라도 깔끔히 매듭을 짓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나는 망설였지만 그게 좋은 충고라는 건 알고 있었다. 걔가 날 더럽다고 쳐다볼까 무서워. 겨우내 계속 나는 망설이고 고민하다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우는 귀찮아하지 않고 그 때마다 한번 부딪혀나 보고 후회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애가 아무 관계없는 내게 친절한 게 미안해 볼 때마다 밥을 사주려 했다. 정우는 허, 하고 웃었다.
 나는 졸업식 전날이 돼서야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나는 네게 졸업식을 마치고 잠깐만 시간을 내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너는 한참 있다가 그래. 하고 짧은 답장만 보냈다.
 졸업식 날 너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식이 시작되어도 오지 않는 네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너는 전화기를 꺼두고 있었다. 나는 선화에게 너를 물었다. 선화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걸 보고 선화가 너희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식 중에 밖으로 나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이 울리고 얼마지 않아 달칵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네가 말했다. 나야. 내가 말했다. 너는 수화기 너머로 침묵을 보냈다. 나는 왜 졸업식에 오지 않냐고 물었다. 너는 그냥 오고 싶지 않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고 말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래. 그래도 졸업 축하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멍했다. 그러다가 전화기가 울었다. 나는 그게 너인 줄 알았다. 너이길 바랬다. 정우는 드물게 들뜬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졸업식 도중에 추가 합격 통지가 왔다고, 그래서 지방에 있는 의대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정우는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우리는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우가 네 얘기를 물었다. 나는 네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됐다고, 이제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네가 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정우와 내 이름 사이에 하트를 그려 넣고 네가 낄낄댔다. 나는 아니라고,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었냐고 네게 따졌다. 너는 선화가 해줬다고, 하지만 선화는 내가 사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며 네 이름과 내 이름을 나란히 쓰고는 나를 보았다. 컷 아웃.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네 방에서 너와 앉아 있다. 나는 고백한다. 나는 내가 잘못된 걸까 묻는다. 너는 아니라고, 다만 너무 바빠 나를 받아줄 수 없었던 네 자신이 슬프다고, 대학에 가서 잘 만나자고 한다. 내가 갑자기 바뀌어 슬펐다고, 서운했다고 한다. 우린 침대에 반쯤 기대어 손을 잡고 함께 했었던 모든 일들을 반추한다. 모닝콜이 울린다. 꿈이 깬다.
 난 애틋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머리맡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전화번호부에서 네 이름을 찾았다. 삭제 버튼을 누를 때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뿐이었다. 핸드폰을 바닥에 던지고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나는 재수를 하고 이듬해 대학에 들어갔다. 정우는 지방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가 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전화는 자주 했다. 그러다 정우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좋다고. 나는 정우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정우를 좋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편한 일이었다.
 너와는 그 이후 연락이 없었다. 선화는 가끔 내게 전화를 했다. 선화는 종종 네 얘기를 했다. 처음에 선화는 네가 대학에서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가 똑같이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선화는 자기와 점점 멀어지는 너에 대한 서운함을 몇 달 동안 토로하더니 네가 교회마저 이상한 곳으로 옮겨 다닌다고 했다. 거기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두어 해가 지나자 선화는 네 얘기를 하지 않았다. 너와는 이제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렇구나. 라고 말하고 넘겼다.

 정우가 저녁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만나 서로를 보고 즐겁게 웃었다. 정우는 나를 데리고 네가 사는 동네로 갔다. 나는 네 생각이 나 조금 움츠렸다. 정우가 웃으며 표를 꺼냈다. 너 빈 소년 합창단 좋아하지. 정우는 내 방의 CD꽂이를 보고 그런 결론을 내린 게 분명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그 음반들을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탄성을 내지르며 정우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는 공연이 시작할 때까지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늦은 4월이었다. 정류장 앞에서 714번 버스를 봤을 때 나는 그 앞에서 열여덟의 네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공연을 보면서도 나는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정우는 중간에 전화를 받고는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급한 일이 있었다고, 미안하다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 다시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나는 그냥 바로 공연장을 나오고 싶었지만 끝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인파에 섞여 밖으로 나왔다. 날이 어둑어둑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바로 걸어갔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내 어깨를 쳤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동그래진 네가 숨이 차 헐떡대고 있었다.

 너는 머리가 짧아졌고 옷이 조금 촌스러운 여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너였다. 그러나 나는 네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던 불쌍한 여고생이 아니었다. 나는 어른처럼 웃으며 반갑다고,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고 했다. 너는 내게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우리 열여덟 살 때 같이 여기 와서 이 공연 봤잖아. 그 때 생각나서 자주 와.
 너는 순간 내 마음을 따끔거리게 했다. 그건 좋은 게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약속이 있다고, 그래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너는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나 너한테 꼭 할 말 있었는데.
 네가 변했다는 선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너는 우리 사이를 가득 메우던 침묵 대신 서투른 대화와 웃음으로 지난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너를 뿌리치며 도망가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각자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했다. 나는 대답이 뜸했고 너는 계속 예전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너는 웃으면서도 불안하게 흔들렸고 나는 그게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정우는 카페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너와 함께 정우에게 갔다. 나는 정우에게 그렇게 많이 네 얘기를 했지만 정우는 네 얼굴을 몰랐다. 나는 너를 그냥 친구라고, 오랜만에 만나 같이 왔다고 소개했다. 정우의 인사를 받은 네가 나를 쳐다봤다. 대학 동기야? 네가 물었다. 나는 남자친구라고 말했다. 너는 멍한 표정으로 아, 라고 짧게 말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키고 짧은 담소를 나눴다. 너는 그러다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나와 정우는 자리에 남아 계속 이야기를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옷에 조금 흘렸다. 나 이 것 좀 닦고 올게. 정우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을 두드리다 점원을 불러 문이 망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너는 안쪽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네가 날 다시 비참하게 만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네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시 멍청한 행동을 반복하려 했다.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던 네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했던 볼이 벌게진 네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조은(문과대 국제어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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