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함께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추앙받는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올 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50년째 되는 해이다. 1946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유리알 유희』를 비롯하여 『데미안』,『수레바퀴 아래서』,『게르트루트』,『나르치스와 골드문트』,『크눌프』,『싯다르타』, 『황야의 늑대』등 헤세의 소설은 세계인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과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해왔다. 헤세의 문학작품은 ‘정신문화의 보물’이라고 칭송할만한 가치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간, 자연, 사회, 시대, 역사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폭넓은 지식이 문학작품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헤세는 소년 시절부터 “나는 누구인가?”하고 스스로 물으며 자신의 개성, 소질, 적성을 찾는 데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무슨 직업을 가질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나’다운 인생인가?”를 수없이 자문하며 가슴에 새겨왔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헤세는 “작가 이외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다. 너무나 일찍 인생의 목표를 정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작가의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나’다운 인생인가?”라는 자문(自問)에 대한 자답(自答)이었다. “목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강요로 14세에 마울브론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이듬해 2월 수도원 학교를 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세는 어렵게 입학한 칸슈타트 인문고등학교 마저도 스스로 그만두고 네카 강변의 에스링겐 시에 위치한 어느 서점의 견습원이 되었다. 그 일도 3일만에 그만두고 시계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는 등,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내면의 흙 속에 씨앗처럼 뿌려진 작가의 비전이 방황의 폭풍우를 뚫고 솟아오르는 문학의 아름드리 나무가 될 줄이야! 이성과 감성이 코러스를 연주하는 언어의 가지끝에 ‘시’의 꽃을 피우고 ‘소설’의 열매를 맺게 될 줄이야! 소년의 내면에서 펼쳐 오르던 독립적 자의식(自意識)의 날개가 부모의 편견적 희망과 집안의 관습적 가치관을 알껍질처럼 산산이 부수고 마침내 자아실현의 하늘길을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그의 대표적 소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비상하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모습은 귄위적 편견과 인습적 강요의 사슬을 끊고 가장 인간다운 인간의 길을 선택한 헤세의 독립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데미안』(헤르만 헤세 지음․ 정소진 옮김)중에서

  스스로 가장 ‘나’다운 인생의 길을 선택한 헤세는 바로 ‘나’ 자신과의 ‘대화’라는 고유한 농법(農法)을 통하여 지성의 빛과 감성의 물줄기를 내면의 밭에 쏟아붓는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문학의 옥토(沃土)로, 사상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발전시키는 작가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소설 『데미안』에서 열리는 독립적 자의식의 길을 대학생들이 걷는 지성의 길로 전환할 수는 없을까? 교수의 강의와 책의 지식을 거리감 없이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수동형 교육’보다는 책의 지식과 강의의 내용을 시대 및 문화의 거울에 비추어봄으로써 비판적으로 선별하여 수용할 수는 없을까?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인격을 도야하고 전문적 능력과 폭넓은 교양을 겸비해나가는 ‘주체적 능동형 교육’을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기성 세대의 교육 패러다임과 교육 방법론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면서 폭넓은 책읽기와 열정적 글쓰기를 통해 자아실현의 여행길을 열어나갔던 헤르만 헤세의 인생을 오늘의 대학생들이 멘토의 귀감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나’ 자신의 안일함, 기성 세대의 관습적 가치관, 부모에 의해 강요된 인생의 비전 등 ‘나’의 정신세계를 가두는 겹겹의 알껍질을 깨고 나와서 바로 ‘나’ 자신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나’의 내면 속에 사유의 힘과 감성의 에너지를 조화롭게 채워나가는 성숙의 길! 이 길이 대학생들의 인생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만나게 된다.      
 교육 체계의 일방성과 교육 방법론의 획일성은 학생의 이성과 감성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여 정신적 성숙의 길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것을 고발한 소설이 『수레바퀴 아래서』라면, 헤세의 또 다른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는 교육의 주체가 된 ‘나’ 자신이 ‘나’의 이성(나르치스)과 감성(골드문트)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 ‘나’ 자신에 대한 ‘주체적 능동형 교육’의 길을 열어간다. 이성적 성찰과 감성적 공감의 과정을 통하여 이성과 감성의 상호보완을 이끌어냄으로서 ‘자아실현’이라는 비전의 빛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청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 대학생들이 잠들어 있는 ‘나’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깨울 차례가 아닐까? 깨울 수 있는 명약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또한, 이성과 감성의 하모니를 자아내는 인생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내면의 악보에 그려 넣을 음표는 무엇일까? 헤세가 자신의 문학작품을 통해 보여준 ‘나’ 자신에 대한 능동적 교육에는 분명한 교육매체가 있었다. 그것은 책, 예술, 자연이었다. 헤세 스스로 선택한 교육매체였다. 이 교육매체는 헤세가 생존했던 반(半)세기 이전의 시대와 헤세가 활동했던 독일 문화권의 경계를 초월하여 21세기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도 자아발견의 각성제로 작용할 수 있다. 책, 예술, 자연은 우리 대학생들에게도 ‘자아실현’이라는 걸작을 낳는 인생악보의 음표가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학생들과 친구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매체는 ‘책’이다.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의 문학인생에 끼친 ‘책’의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웨일즈 태생의 진보적 문화학자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전체 생활방식”을 ‘문화’라고 정의하였다. 프랑스의 문화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문화’를 “강한 의미의 생산 방식”으로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헤세의 작가인생에 있어서 ‘강한 의미를 생산하는’ 책읽기의 생활 방식, 즉 ‘독서문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헤세가 직접 체험한 책읽기의 생활 방식을 오늘날 대학생들의 독서문화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일까? 소설 『싯다르타』를 비롯한 헤르만 헤세의 여러 작품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문화적 지식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가 다양한 책읽기를 자신의 독서문화로 향유했음을 의미한다. 헤세는 소년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많은 책을 골고루 읽었다. 당시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 철학박사, 인도학자였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더르트의 서재는 세계 각국의 문학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헤세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책읽기는 문학만이 아니라 인문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누볐다. 헤세는 문화, 자연, 인간, 예술에 대한 이해력이 넓고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러한 심원한 이해력은 폭넓은 독서의 소산이었다. 그는 문학, 신학, 철학, 심리학, 역사학, 종교학, 사회학 등 인문과학의 명저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명저들까지도 섭렵하였다. 독서의 편식을 거부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책과 지식을 ‘통섭’시키는 헤세의 독서문화는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끄는 결정적 이정표가 되었다. ‘통섭’의 의미를 시사하는 나르치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   켜 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헤르만 헤세 지음․임홍배 옮김) 중에서
 
  헤세의 작가 생활에 결정적 에너지를 제공했던 ‘통섭’의 책읽기를 대학생의 독서문화로 전환할 수는 없을까?  전공 분야에만 갇혀 있지 말고 비전공 분야의 양서들도 폭넓게 읽으면서 서로 다른 학문들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자. 다양한 학문들간의 상호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통섭’의 책읽기를 대학생의 독서문화로 맞이해보자.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학생 시절  ‘그리스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그리스어로 시를 즐겨 썼다고 한다. 독일 문학에도 밝았던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며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전에 대한 파우스트 박사의 응전을 발견하는 순간,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연속”으로 규정하였다. 토인비의 명저 『역사의 연구』는 문학과 역사학간의 ‘통섭’에서 맺은 결실이었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헤르만 헤세가 열어놓은 ‘통섭’의 독서문화 속에서 나르치스가 이끄는 지성의 길을 걸어가 보자. 골드문트가 선사하는 예술의 빛과 자연의 향기를 마시며 통섭적 책읽기를 ‘나’ 자신의 독서문화로 받아들이는 나르치스의 지성을 대학생들에게 기대해본다.

송용구 시인. 문학평론가. 본교 연구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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