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해온 ‘이산(離散)유대인’, ‘유대인 이산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 외에도 민족 집단 성원들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과정뿐 아니라 흩어진 동족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민이나 국제적 인구이동을 표현하는 의미로써 강제이주나 비극적 민족이산의 경험을 지칭하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디아스포라’는 민족의 국제 이주, 망명, 이주노동자, 민족공동체, 문화적 차이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진 지금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고 있다. 윤인진 교수(문과대 사회학과)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디아스포라는 민족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해외 곳곳에 거주하기 때문에 한민족공동체와 해외한인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의 중심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본교에서 디아스포라를 연구하는 윤 교수의 도움을 받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특징과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특징
한민족의 해외 거주 인구는 2011년 기준 72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중국(3420만명) △이스라엘(850만명) △이탈리아(758만명)를 이어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숫자다. 본국 거주민 대비 해외 이주민의 비율은 약 10%로 이스라엘을 이어 세계 2위에 이른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특징은 지정학적 위치의 집중성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175개국으로 전 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분포한다. 하지만 대부분 한반도를 중심으로 대립하고 있는 미-일 남방삼각과 중-러 북방삼각의 국가들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중국(1위, 270만명), 미국(2위 210만명), 일본(3위, 90만명), 독립국가연합(4위, 53만명)에 거주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전체 중 약 87.98%를 차지한다. 그 중 미국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에 인접해 있는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의 거주자 비율은 57%를 차지하고 있다. 


1860년대~1910년대, 구한말의 이주
1860년대는 한민족의 해외이주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로 본격적인 해외이주가 시작됐다. 토지부족과 인구대비 농업 생산성 부족, 1860년대 기근은 농민들이 토지를 찾아 연해주, 만주 등지로 이동케 했다.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입국이 금지됐던 지역의 농지를 개간하며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1875년 봉금령이 해제되자 한인들은 해란강을 중심으로 한 용정, 훈춘, 연길 등을 개척하며 벼농사를 지었다. 이후 1907년에는 연길 지방에만 5만호 이상의 한인이 거주했다. 이들은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과 같이 역경을 헤치고 중국인의 심한 착취를 견디면서 한인사회의 기반을 닦았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인의 이주는 1902~1903년부터 시작됐다.

1910년대~1945년, 식민통치하의 이주
일제 통치시기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했다. 또 이 시기에는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일본은 만주지역 개발을 목적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를 실시해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 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 증가 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한인들이 노동자 신분으로 일본으로 이주했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끌려갔다.
러시아와 중국으로의 이주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시작됐다. 안중근, 유인석, 홍범도 등의 망명으로 당시 러시아 한인 사회는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 등 제 3국을 통하여 망명형식으로 미국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1910년에서 1918년 사이에 514명에 이르렀다.    

1945년~1962년, 전후 이주
해방 이후 해외 이주는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명의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했고 한국전쟁이후엔 전쟁고아 5000여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0년대는 남미 지역으로의 농업이민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이 시기 미국이 새 이민법을 제정해 종전의 유럽중심에서 아시아 중심으로 이민의 수용대상을 바꾸게 됨에 따라 미국으로의 이민이 급증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여명의 유학생들이 학위 취득 후 고국에서 누릴 사회적 권위와 출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2년부터 현재, 현대의 이주
1962년 해외이주민법이 제정된 이후 해외이주는 시기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제까지의 난민적 성격의 이주가 아닌 체계적이고 정책적이며 자발적 이주가 이뤄졌으며 정착을 위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들면서 남미로 향한 이주자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돼 연고초청에 의한 이주민 수가 급증했다. 미국으로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해 1971년~1980년 사이 한인 이주자 수는 27만 2000명에 달했다. 꾸준히 증가하던 해외이주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해외이주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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