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NHK 방송은 몇 년 전 아무리 일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해 큰 충격을 던져줬다. 홀로 남자 형제를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두 개의 일을 하고 있지만 생활비 대기에도 빠듯한 어머니. 일자리를 구하려 발버둥치지만 1만 원 정도 되는 교통비가 없어 면접보는 걸 망설이는 구직자 남성. 쉬는 날 없이 일해도 삶의 수준은 빈곤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람들, 이른바 ‘워킹 푸어(working poor)’다.

일본의 예를 들었지만 워킹 푸어의 존재는 한국에서도 현실이 된 지 오래다. 고된 일 끝에 최저생계비를 겨우 벌어 한탄하며 살아간다는 스토리는 이제 흔할 정도다. 최근엔 워킹 푸어들의 좌절이 분노로 바뀌어 각종 ‘증오 범죄’를 낳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의 불만과 한탄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넘어섰다. 정치 사회적으로 한국 사회의 불안요인이 돼가고 있다.

상당수 대학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않다.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주독야경(晝讀夜耕)한다. 그것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이 학자금 대출에 손을 내밀수밖에 없다. 빚에 억눌려 교문을 나서야 하는 대학생들에게 당장의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은 학자금 대출경험이 있는 대학 재학생과 졸업생 9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응답자 3분의 1이 연체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그나마 마음 먹고 받은 대출도 쉽게 밀린다는 뜻이다.

갚지 못한 빚 때문에 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미래 소득을 위한 ‘스펙 쌓기’는 소홀해진다. 가난이 가난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셈이다. 쳇바퀴에 갇힌 대학생들을 워킹 푸어와 대비되는 ‘캠퍼스 푸어(campus poor)’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은 나올 수 없다는 자괴감이 을씨년스러워진 캠퍼스에 감돈다.한국 사회에서 ‘젊음’은 한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즐거움을 뒤로 미루면 어느 정도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성공신화가 넘쳐났고 누구나 신화 속주인공을 꿈꿨다. 지금 신화는 유령이 돼떠돌고 있다.10년 전만 해도 일부 운동권 학생의 투쟁언어라 여겨지던 ‘등록금 인하’는 이제 보수정당 대통령 후보에게서까지 들을 수 있게됐다. 그만큼 대학생들이 처한 상황이 절박하다는 방증이다. 언젠가부터 대학생들마저 ‘사회적 약자’가 돼버린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할지 모르지만 사회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국가장학금이나 각종 대출 이자 지원 제도가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과거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도 희망도 사라진 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짐을 안겨줘야 할까. 짐을 덜어주고 캠퍼스 푸어의 비참함을 보듬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합의와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윤재언 매일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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