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중앙박물관은 30일(금)까지 ‘조선을 지켜낸 힘, 그 내면을 톺아보다’를 제목으로 대학박물관 연합전시회를 연다. 연합전시회는 △경희대 △고려대 △건국대 △국민대 △성균관대 △육군박물관 △한양대 총 7개 대학박물관이 참여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해 복권위원회의 후원으로 진행됐다. 이번 전시회는 보물 854호 ‘세총통’, 보물 1553호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를 비롯해 각 대학에서 공수한 127점의 귀중한 조선의 군사 유물을 볼 수 있다. 경희대 중앙박물관 김용은 학예사는 “군사문화재의 정수를 모았다”고 말했다. 유물은 △화약무기 기술의 발전 △병법의 변화와 외래무기의 도입 △변경(邊境)에 대한 관심과 지도 △전쟁의 기억 △군인의 일상 등 다섯 개 테마로 나뉘어 전시됐다. 전시가 한창인 12일, 경희대 중앙도서관 4층에 위치한 중앙박물관을 찾아갔다. 전시된 유물과 김용은 학예사의 설명을 중심으로 조선의 군사 기술과 관련 기록을 살펴봤다.

화약무기 기술의 발전
전시관에 들어서자 TV 영상이 눈에 띈다. 조선의 로켓형 무기 신기전을 만들어 발사하는 과정을 녹화한 영상은 대전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직접 제공한 것으로 전시에 생동감을 더했다. 유물은 화약무기의 발전상을 볼 수 있도록 고려 초부터 조선 말까지 사용된 시대 순으로 배치됐다.
세종은 북쪽 변방을 수복하기 위해 지상전에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하고 지방마다 제각각인 화포를 표준화했다. 1448년(세종 30년)에 편찬된 <총통등록>은 당시의 성과를 기록했는데, ‘세총통’은 국내에서 가장 작은 개인용 화포로 보물 854호로 지정돼있다. 이 당시 총통은 탄환을 쏘는 것이 아니라 화약을 장전해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조선은 총통 외에 ‘신기전’과 ‘비격진천뢰’와 같은 위력적인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로켓형 무기인 신기전은 화살대의 윗부분으로 화약의 연소가스가 분출되면서 날아가도록 설계됐다. 2009년 개봉한 영화 <신기전>에서 묘사한 것처럼 파괴적인 무기는 아니었지만, 공중에서 타오르는 신기전의 화염은 적의 기세를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무기로, 폭발 시 커다란 원형의 탄환 안에 들어있는 철편이 사방으로 날아가는 살상무기다. 김용은 학예사는 “임진왜란 때 실제로 사용된 위력적인 무기”라고 말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총의 위력을 깨달은 조선은 1614년(광해군 6년)부터 화기도감을 설치해 조총을 양산했다. 전시된 조총은 모두 조선 후기 군인이 실제 사용하던 것이다. 조총 옆에는 왜군이 쓰던 검과 검갑이 받침대에 층층이 올려있었다. 전시를 고안하는 과정에서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김용은 학예사는 “검 받침대를 직접 만들면 비용이 많이 들어 고민하던 중 우연히 초밥 집에 있는 접시 받침대를 보게 됐다”며 “조금 고치면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생활용품점에서 받침대를 사서 직접 손을 봤다”고 말했다. 

병법의 변화와 외래무기의 도입
전시장의 한쪽 벽면에 가로 221cm, 세로 141c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이 걸려있다. 본교 박물관이 출품한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로, 각 지역 봉수대의 위치를 나타낸 조선의 일급군사기밀지도다. 비스듬한 전시대 위에는 나각이 올려져있고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나팔이 사선으로 걸려있다. 김용은 학예사는 “시각적 상승효과를 고려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조선 전기에는 개인의 전투력보다는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와 전투 대형에 의존하는 방어전술이 활용됐다. 임진왜란 이후 평양성전투에서 활약한 명의 절강병을 보고 조선군은 근접 전투 중심 전술서인 <기효신서>를 도입해 보병전술을 대폭 개편했다. 1598년(선조 31년) 삼수병제(사수·살수·포수)를 근간으로 한 훈련도감이 설치됐다. 조선 후기 조총의 비중이 높아지며, 삼수병제는 포수 중심 보병전술로 변화해 병력규모가 대대적으로 확대됐다. 18세기 초 104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게 됐다.

다양한 외래무기를 도입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개량해 실전에 활용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전시 중인 ‘불랑기포’는 서양식 화포로, 가장 작은 크기인 5호로 분류돼 있다. 불랑기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어로 프랑크족을 뜻하는 플랑기에서 비롯됐다.

변경(邊境)에 대한 관심과 지도
본교 박물관은 이 기획에 18세기 전반 강화일대를 그린 ‘강화지도’와 ‘폐사군국경수어도’를 출품했다. 김용은 학예사는 “강화지도가 너무 커서 전시장에 넣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며 “지도를 다 펼치지 못하고 밑에 부분을 말아 걸을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강화지도’는 북으로는 황해도 경계, 동으로는 서울 삼각산까지를 포함한 강화도 일대를 그렸다. 고려 이후 강화도는 외곽방어요새로 기능해, 수비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몇 차례 지도가 발간됐다. ‘폐사군국경수어도’는 폐사군(廢四郡) 일대를 그린 국경지도다. 사군은 조선 초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세웠던 △여연 △우예 △묵장 △자성을 뜻하는데, 이 지역은 일상생활과 교통에 난점이 많았다. 세조 11년(1465년) 몽골족 침입을 우려해 자성을 제외한 삼군을 철폐하고 주민을 구성, 강계로 옮겼다. 그 후 자성마저 철폐돼 폐사군이 됐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변경은 농업생산성이 낮아 삼남지방에 비해 관심이 적은 지역이었지만, 두 차례 호란 이후 북벌론이 등장하며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조선 전·후기 변경에 대한 인식 차이는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북쪽을 남쪽보다 훨씬 작게 묘사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전기 지도와 달리 후기 지도는 비교적 정확하게 땅의 비율을 묘사했으며, 지도 속에 다양한 정보를 담아내고 있다. 전시된 ‘서북국경도’의 경우 요동의 책문과 주요 도로를 상세히 그리고 있다.

전쟁의 기억
조선에 큰 상흔을 남긴 임진왜란은 국가적으로 공식화된 기억과 민간에서 생성된 기억이 서로 다른 형태로 기억을 남긴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전쟁의 기억을 담은 그림과 책을 전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고심했다. 불안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으로 충(忠), 효(孝), 열(烈)에 대한 기억을 만들었다. 그동안 양반층도 집안별, 지역별로 의리를 지킨 이야기를 책으로 묶으며 국가적 기억에 가세했다. 

국가적 차원의 기억과 달리 민간의 전쟁 기억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 민간신앙, 영웅숭배심리가 뒤섞였다. 대표적으로 전시 중인 소설 ‘임진록’과 ‘임경업전’이 있다. 영웅적 인물들이 신묘한 능력으로 적군을 혼쭐내는 내용을 읽다보면 호쾌함마저 느껴진다. 김용은 학예사는 “임진록에 비해 임경업전은 보다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작품”이라며 “임경업 장군이 죽는 슬픈 결말로 끝나는 것도 소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임경업 장군의 사후, 무당들은 임 장군을 그들의 수호신이자 어업신으로 모셨다. 그 때문에 서해안 풍어제에서는 임 장군의 신령을 부르는 풍어굿이 행해진다.      

한편 전쟁 중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후대 연구에 도움을 준 책도 눈에 띈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은 ‘미리 벌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김용은 학예사는 “지금 전시된 작품은 일본에서 번역돼 출판된 것”이라며 “이 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본이 그린 조선전도 면을 펼쳐 전시했다”고 말했다.

군인의 일상
조선시대 군인은 신분에 따라 다른 군대 편제에 속했다. 평상 시 군인은 무예와 진형을 갖춰 대오를 짓는 법을 훈련했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조선 군인의 훈련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병장도설’, ‘병학지남’, ‘무예도보통지’가 전시됐다. 조선 후기가 되며 양반이 군대에서 빠지자 양인들도 불법적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군역에서 벗어났고, 군포만 납부하는 군인의 비중이 커졌다. 그 결과 수나 전투능력이 월등한 직업군인인 훈련도감이 군대의 주축을 차지하게 된다.

무관이 되려면 3년에 한 번 실시하는 식년무과나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무과를 치러야 했다. 무과에서는 28명 선발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뽑았다.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홍패’를 받게 되는데, 액자에 걸린 ‘홍패’에는 합격자의 성적, 등급, 성명이 적혀있다.

조선은 비합리성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 국가였지만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승리와 생존을 위해 초월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신령한 힘이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사인검’은 이러한 군인들의 바람이 담겨있다. ‘사인검’은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寅) 자가 연, 월, 일, 시에 모두 들어간 날에 만들어진 검으로, 검날에는 28수 별자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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