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이한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철학, 정치학, 교육학, 낭만주의 문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서 자취를 남겼다. 특히 교육학에서 루소가 끼친 영향은 철학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견된다. 그의 저서 <에밀 또는 교육에 대하여(1762)>는 제도화된 교육 혹은 국가주의 교육의 폐단을 뛰어넘어 ‘자연주의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이념을 제시했다. 교권이 추락하고 대학생은 취업 준비에 매몰되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 루소는 어떻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 루소에 대해 다수의 저작을 펴낸 김상섭(영남대 교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루소의 교육관을 짚어봤다. 

루소 교육관의 배경
18세기 유럽은 사회의 변혁기였다. 영국은 산업혁명에 이어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근대화에 착수했고 프랑스는 기능적 지식의 축적을 통해 국부의 증가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루소는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 군상 속에서 ‘소외된 인간’을 목격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쓰인 <에밀>은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상의 탄생과정을 묘사한다. 이는 문명과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 즉 ‘자연인’의 회복이다.

에밀과 사회계약론
루소는 ‘자기애(自己愛)’라는 자연인의 근원적 원칙이 사회 속에서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한 원인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나아가 이러한 타락에 맞서 자연인의 원칙인 자기애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실현할지를 모색했다. 전자를 규명한 것이 <인간불평등 기원론>이고 후자를 규명한 것이 <에밀>과 <사회계약론>이다. 1762년 동시에 출간된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루소가 교육과 정치를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교육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만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가 되며 사회계약정신에 의해 구축되는 정치질서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내는 모태가 된다.     

루소에 대한 비판
루소의 교육관은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대표적 비판가는 19세기의 철학자·교육학자인 듀이다.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루소가 교육의 본질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듀이의 관점에서 교육은 아동의 내면 깊이 들어있는 순수한 무엇을 끄집어내거나 발현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듀이는 루소의 교육관이 내면의 신비인 ‘자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교육의 창조성과 역동성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김상섭 교수는 “이는 듀이가 루소의 자연개념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듀이가 이해하는 자연은 이미 있는 것, 인간의 손을 거치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루소에게 자연은 주어질 수 있는 것, 혹은 주어져야 마땅한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루소가 생각한 교육은 자연을 능동적으로 계발해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루소의 현대적 의미
김 교수는 최근 이슈화된 교권의 추락에 대한 해답을 <에밀>에서 찾는다. <에밀>에서 루소는 자연의 질서, 혹은 필연성이라는 자연법칙에 의거해 에밀의 자유를 규제한다. 하지만 교육적 권위는 교사라는 직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루소의 규제에 권위가 실리는 것은 자연법칙, 도덕법칙의 준엄성 때문이다. 때문에 교권은 교직의 권위가 아닌, 자연성에 대한 투철한 탐구를 바탕으로한 교사의 지적, 도덕적 권위에 바탕을 둬야 한다. 

아동 교육서로 알려진 <에밀>은 대학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에밀>의 제 5부에서 루소는 에밀의 아내가 될 20대 초반의 소피를 교육한다. 소피는 사회계약정신을 배우고 구체적인 국가들의 정치체제와 풍토, 문화 등을 탐구하며 넓은 의미의 정치적 판단력를 배운다. 자연법칙, 인간관계, 도덕과 종교, 역사의 탐구는 20세 이전에 끝내는 교과다. 김 교수는 “루소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어린이 시절의 연장에 불과하다. <에밀>은 대학생이 순수한 의미의 지적 노동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원리를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실천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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