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해가 저문다. 짧은 해는 가을걷이를 마친 빈들처럼 쓸쓸하다. 그러나 알곡이 가득한 이삭으로 풍요롭던 가을이 바로 등 뒤에 있고, 다가올 봄을 위한 ‘텅 빈 충만’이 다가오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11월, 그래도 아직은 한 달이라는 여유가 있지 않은가. 마지막 달을 위한 성찰과 지나간 열한 달을 반추하기에 알맞은 때이다. 서관 아래로는 은행나무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샛노란 은행잎에 대비되어 푸른 하늘이 더욱 눈에 부시다. 나뭇가지가, 줄기가 보인다. 잎을 털어내며 마음을 비워가는 나목의 모습으로 하늘 향한 기원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나를 돌아보자.

계절의 순환처럼 캠퍼스의 꿈과 낭만도 저만큼 물러나고 이제 자네들은 학업의 마무리로 분주하리라. 씨 뿌리던 봄의 기대와 한여름의 고된 땀 흘림으로, 가득해진 들녘처럼 풍요로운 안암의 전당에서 자네들은 어떤 수확을 하였는가? 세상의 혼돈과 파열의 굉음을 탓하며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제 첫발을 내디딘 프레시맨들은 부풀었던 꿈의 한 해가 훌쩍 가버릴 것이고, 거친 광야를 향해 교문을 나서야 할 졸업생들도 있을 것이다. 어렵게 젖은 빵을 먹으며 학자금을 벌고 있는 자네들은 또 얼마나 보람찬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지금 당장은 고되더라도 모두가 다 녹록지 않은 학업이며 삶이다. 더러는 넉넉한 환경에서 호화로운 대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삶에서 결핍된 그 무엇이 언젠가는 초년의 고생을 능가하는 어려움으로 뒤바뀔 수도 있으니, 겸허함을 잃지 말고 스스로를 채근하여 전인간으로의 길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대생이 되어 석탑의 품 안에 안주하다 보면, 그리고 고향처럼 푸근한 안암의 언덕에 익숙하다 보면 세상이 얼마나 넓고 가파른지 모르게 된다. 세상의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모자랄 데 없는 캠퍼스, 우수한 교수진, 선진화된 교육시스템 속에 자네들은 당연한 특권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네들은 전공학점 이수에만 전전긍긍한 것은 아니었나? 앞으로의 삶에 진정한 자양분이 될 인성 훈련은 얼마나 연마되었을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덕목과 지혜를 얼마나 쌓았는가? 물론 오늘날의 교육 현실과 사회현상이 이 근원적인 질문에 가까이 가기조차 어렵도록 각박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조상들이 이어놓은 역사의 다리를 이을 세대로서 자네들이 떠맡을 오늘의 한국을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아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멀리 나는 새가 많이 보고 경험한다. 지식과 지혜로 말하면 자신의 전공과 연계된 인접학문의 지식을 통섭하며,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여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 이제 푸른 창공을 향해서, 넓고 깊은 망망대해를 향해서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불과 일백여 년 전의 우리나라의 사회 상황과 오늘날의 그것을 그리고 서양에서의 경우를 비교해 보라. 저들이 수백 년에 걸쳐서 이룩한 민주주의와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발전이 이제는 남부럽지 않지 않은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쉼 없이 달려온 자네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의 땀과 피의 결실이 없었다면 가능했던 일인가? 석탑을 떠나는 순간부터 자네들은 스스로 날고 달리고 헤엄쳐 이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돌아올 모천을 잊지 않는 것도 명심해야 할 근본임을 기억하자.

이제 다시 잎을 다 떨구어 버린 은행나무 아래 서 보자. 그 화려하던 금빛 날개를 접고 모든 욕망과 집착을 끊고 동면에 드는 모습을 눈여겨보자. 그들은 쉬려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더욱더 치열한 싸움으로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북풍의 눈보라도, 삼동을 지나는 세한의 아픔도 견디어야 한다. 찬바람에 가지를 떨 때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가며 다짐할 것이다. 돌아올 새해를 위해 다가올 봄을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다. 더욱 보람찬 내일을 위해서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신우균 문과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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