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균관대 안에 있는 명륜관 전경
현대 중국에서의 유교

오랜 기간 중국의 국가 지도 이념으로 유지된 유교는 20세기 중국에서 철저히 짓밟혔다. 유교의 전근대성이 사회주의 이념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근, 유교는 중국에서 차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현대 중국에서 일고 있는 이런 변화는 유교의 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중국최근세사를 전공한 박상수(문과대 사학과) 교수와 함께 현 중국의 유교를 살펴봤다.

유교의 폐기
20세기 초 중국에선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일었다. 서구 문명의 충격으로 과학과 민주주의 사상에 눈을 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유교는 미신적인 사상, 전제주의의 기반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수나라 이래로 이어져 온 중국의 과거제가 1905년 폐지됐다. 이는 유교가 정치제도로서 생명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유교 이념이 결정적으로 퇴조한 계기는 1910년대 후반에 일어난 ‘5.4운동’이다. ‘5.4운동’을 주도한 신지식인들은 중국의 봉건적 제도·문화의 근원을 유교에서 찾고 대대적인 사상개조에 나섰다. 한(漢)대부터 국가지도이념으로 이어진 유교는 전근대의 상징으로 서서히 중국에서 퇴조하는 듯 보였다.

정치 수단으로 이용된 유교
하지만 유교는 중국 사회 전반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박 교수는 “사회에 내재된 유교는 집권자의 필요에 따라 때때로 부활했다”고 말했다. 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총통으로 등극한 원세개(袁世凱)는 공화제를 폐기하고 황제가 되고자 한다. 그는 반동복고의 수단으로 ‘공자 존숭운동’을 벌인다. 또 1928년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민중 교육을 실시하며 유교적 개념인 ‘예의염치’를 강조했다. 국민당은 근대적 지식인을 기반으로 한 혁신 세력이었지만 통치의 균형과 안정을 위해 유교적 개념을 부분적으로 차용했다.

개혁·개방 속의 재조명
1949년, 사회주의 이념 위에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세워지자 유교는 한동안 다시 철저히 배척당한다. 집단소유제로 경제권이 가장에서 사회로 이동하며 유교적 폐습인 남녀차별, 가부장권이 극복되고 자기헌신과 같은 사회주의 도덕이 유교적 도덕을 대체했다. 하지만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서구의 자본과 기술이 도입되며 중국의 지식인 사이에 ‘정신오염’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돈을 위해 부정을 일삼고 타인과 공동체를 경시하는 등 자본주의의 폐해가 나타나자 지배층은 사회주의 도덕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됐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전통 사상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고 이 중 공자와 유교가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했다. 

‘사용’되는 유교
하지만 박 교수는 “공자와 유교가 과거처럼 하나의 이념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각 나라의 대학과 교류를 위해 ‘공자학원(孔子學院)’이라는 교육기관을 국비로 지원 중이다. 하지만 ‘공자학원’은 중국의 문화와 중국어를 선전할 뿐 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중국 정부는 2011년 1월 천안문 서쪽에 9.5m 높이의 ‘공자 동상’을 설치하지만 2011년 4월 중국 공산당의 반대로 철거했다. 이는 공자가 사상가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국가브랜드’로 취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교 이념 역시 갈수록 축소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빈틈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분석이다. 가정에 스며들었던 사회주의 도덕이 퇴조하면서 유교의 ‘효(孝)’가 강조되고 개인화가 심화되면서 ‘충(忠)’을 활용하는 식이다. 박 교수는 “이는 현재 중국의 지식인·지배층이 유교를 하나의 총체적 지도 이념으로 보기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선택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