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작은 서재 안을 둘러본다. 한쪽 벽을 모두 가린 책꽂이에는 사전과 독일어 교재, 신앙 서적 등이 빼곡히 꽂혀 있고, 작은 책상 위에도 고인이 즐겨 읽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정성스럽게 정돈된 방의 주인은 지난 8월 4일 이른 아침에 안암병원에서 3년간의 모진 암 투병 끝에 운명한 故 신혜선(독어독문과 64학번) 본교 강사.

본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추모의 뜻을 모아 법학도서관 2층의 뱅갈 고무나무에 ‘신혜선 교수 고대 법대 교양독일어 담당(1982-2012)’이라고 적힌 팻말을 헌정하면서 한 일간지를 통해 알려지게 된 고인. 그녀는 2009년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도 강의에 대한 열정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꿋꿋하게 강단에 섰다.

고인과 본교의 인연은 1964년 고인이 본교 독어독문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본교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홀로 되신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박사과정 이수 중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학위를 미처 받지 못하고 돌아와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지만 당시 독어독문과에 있었던 박찬기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1982년부터 법대에서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어온 본교와의 인연을, 고인은 전 재산의 절반가량인 6000만 원을 기부하고 떠나면서 따뜻하게 끝맺었다. 본교에서 무려 30여 년간 시간 강사와 중앙도서관 사서를 지내며 받은 백만 원을 조금 웃도는 월급을 아껴 모은 소중한 돈이다. 6000만 원 중 5000만 원은 내년부터 독어독문과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될 예정이고, 나머지 1000만 원은 동문들이 만든 ‘고암독일학회’에 전달됐다.

“언니가 학교랑 학생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까 학교에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놀라지는 않았어요. 학교에 대한 긍지가 정말 높았지요. 그리고 학생들을 아주 끔찍이 아꼈어요. 아침을 못 먹고 오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과일 같은 것을 싸가지고 가서 먹이고, 오전 수업을 할 때는 혹시 학생들이 자다가 수업에 못 나올까봐 전화해서 깨우고…. 제가 ‘학생들한테 하는 반만큼만 나한테도 좀 해 줘’라고 투정을 부릴 정도였지요”

고인의 동생 신혜경(여∙65세) 씨가 고인을 회상했다.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던 고인은 병상에 누워서도 강의 준비에 소홀하지 않았고, 병이 주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쉽사리 강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항암 치료와 투석 치료 때문에 일주일의 절반을 병원에서 보내면서도 강의를 나가는 날이면 “나 하나도 안 아파”라며 활짝 웃는 얼굴로 강단에 섰다. 혜경 씨는 “차라리 인원수가 모자라서 폐강되기를 바랐어요”라고 말했다.

학교에는 고인의 투병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만큼 아픈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아프셔도 우는 소리 한번 안 하셨죠. 동생들이나 제자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이 아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하며 고인을 알아온 본교의 직원은 그렇게 고인을 회상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정이 많아 늘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 사람이 고인이었다. 법대의 노교수는 뒤늦게야 고인의 소식을 듣고 몇 번이고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정말이냐’라고 되물었고, 하루 종일 밥을 넘기지 못했다.

“언니는 떠났지만… 그저 누구보다도 열심히 가르쳤던 선생님, 모교를 사랑했던 선배로 기억해주면 좋겠네요” 혜경 씨의 소박한 바람이다.

고인은 암 선고를 받기 전 블라디미르 카미너의 소설 <러시안 디스코>를 번역했다. <러시안 디스코>의 시작에 적혀 있던, 고인이 가장 사랑했던 작가 괴테의 말이 유난히 마음을 맴돈다.

사랑은 여전히 다른 모든 것들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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