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일본 총선(중의원 선거)의 두드러진 특징은 극우 노선의 약진이다. 자민당은 평화헌법 개정, 영토문제 강경 대처 등의 극우 공약을 내세우며 294석을 얻었고, 극우 정당인 일본유신회는 54석을 차지했다. 특히 일본유신회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제 2당으로 내려앉은 민주당(57석)에 버금가는 세력이 됐다. 이처럼 극우 세력의 부활로 일본정치사에서 유례없는 격변기를 맞은 지금,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를 짚어봤다.

전후 우익의 정치세력화
태평양 전쟁 패배 이후 치러진 1946년 제 1회 총선에서 우익 세력의 자유당이 제 1당이 됐다. 요시다 시게루가 총재가 돼 전후의 정계를 처음으로 이끌게 됐다. 요시다는 자유당을 이끌며 일본의 경제적 부흥과 주권 회복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는데, 민주화보다는 경제부흥에 방점을 둬 무역에 의한 경제 재건을 추진하는 ‘상인적’ 국제정치관을 기저로 삼았다. 또한 평화헌법에 의한 국방력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평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재군비 정책도 추진해 1954년 자위대를 창설한다. 하지만 ‘일본 보수의 원류’라 칭해지는 요시다의 개혁은 미국의 점령정책 개정과 정통 우파 정치인의 정치참여 제한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이뤄졌기에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1951년 공직에서 추방당했던 자유당 전임 총재 하토야마 이치로가 정계에 복귀하자 자유당은 전직 관료 중심의 요시다파, 중간파, 그리고 정통 정치인 중심의 하토야마파로 나뉘게 된다. 자유당 내의 하토야마 세력을 필두로 한 전통 우파 세력은 일본 외교정책의 다원화, 평화헌법의 개정, 일본군 본격 재정비 및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평화헌법을 받아들인 요시다 계열의 온건 우파세력과 달리 전통 우익 세력들은 일본의 자주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바가야로 해산
이 시기 요시다 세력과 전통 우익 세력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요시다 수상은 1953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 의원에게 ‘바가야로(바보녀석)’라는 욕설을 한다. 사회당은 이에 대응해 수상징벌동의안을 제출했다. 요시다는 이에 관련 의원을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하토야마파의 주도로 내각불신임안이 통과되자 일명 ‘바가야로 해산’이라고 불리게 되는 국회 해산을 단행한다. 이 일로 하토야마파 세력은 1954년 탈당하여 진보적 보수주의의 개신당, 일본자유당과 함께 보수합동을 추진해 일본민주당을 창당했다. 중의원 121명, 참의원 18명의 제 2당으로 출발한 일본민주당은 헌법 개정과 정식 군대의 창설을 주장하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요시다 세력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요시다 정권은 실각하고 만다. 뒤이어 하토야마 내각이 구성됐는데, 1955년 총선거에서 일본민주당은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85석을 확보했고, 자유당은 112석을 얻었다. 이에 하토야마 내각은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한 안정적 정국 운영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사회당 또한 우익 세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1951년 이래 좌‧우파로 분열돼 있던 사회당을 통합해 1955년 ‘일본사회당’을 결성했다. 우익 또한 이에 맞서 1개월 후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으로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한다. 자민당은 이후 54년간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며 우파 세력의 좌장이 된다.

1960년 안보 투쟁
요시다의 실각 후에도 요시다파와 하토야마의 민족주의 우파세력간의 대립은 이어졌다. 하토야마는 1956년 소련 방문을 단행해 소련과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국교 체결 이전까지도 요시다파의 의원들은 시국간담회를 조직해 하토야마의 소련 방문에 반발했다. 결국 하토야마는 소련 방문을 끝으로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후임 선거에서 보수 자유주의자 이시바시 단잔이 당선되지만 2개월 만에 병으로 사임하고, 하토야마계의 기시 노부스케가 다음 정권을 이어받았다. 우파 민족주의 성향의 기시는 미‧일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기시는 종전 직후 체결된 미국 편의 위주의 안보조약을 평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1960년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좌파뿐만 아니라 보수 자유주의자인 미키 다케오, 이시바시는 조약안 강행 채택에 항의하는 의미로 회의장에서 퇴장했고, 후에 기시의 퇴진을 요구했다. 6월에는 총파업이 이뤄지고 전국에서 40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기시는 결국 하토야마의 수순을 따라 미일안보조약 비준서 교환 직후 사의를 표명했다. 기시의 퇴진으로 하토야마, 그리고 후임 기시 내각에서 일관되게 이어진 반요시다주의가 종국을 고했다. 이후의 정국은 자민당 주도 하에 자민당 내의 파벌들이 주도권을 주고받는 식으로 전개됐다. 일정 시기의 주도권을 쥐었던 파벌이 실정하면 다른 파벌이 이를 비판하며 당내 주류세력이 되는 식이었다. 경제 문제와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인 ‘록히드 스캔들’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퇴진하자 깨끗한 이미지의 미키 총리가 후임이 되고, 록히드 스캔들 처리에 불만을 품은 고노 요헤이 등의 자민당 소수 의원들이 탈당해 자민당이 총선에서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후쿠다 다케오가 취임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유사 정권 교체’를 이뤘다.

일당 지배 체제의 끝
1989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IT회사 리쿠르트로부터 1억 5100만 엔을 받는 비리를 저질렀음을 공식 인정하고 사퇴했다. 하지만 다케시타 퇴진 후에도 정치개혁의 움직임은 더뎠고 결국 자민당은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다케시타의 후임이었던 우노 소스케 총리는 책임을 물어 퇴진했지만 뒤를 이은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여전히 당내 최대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다케시타파의 세력가 오자와 이치로를 간사장에 임명해 실권을 내준다. 하지만 자민당의 실세로 군림하던 오자와와 그의 일파는 노선차이로 인해 1993년 자민당을 탈당했다. 패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권국으로 활동하자는, 자민당의 기본 노선과 거리가 있던 ‘보통국가론’을 주장했지만 정국운영에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내분이 가속화돼 1993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23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더 이상 일당으로만 정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결국 자민당은 사회당과의 연립정권 구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회당과의 연립은 강경 보수파의 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이에 자민당은 다시 중도 야당 공명당과의 연립을 통해 다시 정권을 연장했다.

민주당의 성장
2001년 위태롭던 자민당의 바통을 이어받은 고이즈미는 구조개혁을 통해 ‘전후 국가체제’의 해체를 시도했다. 경제적으로는 ‘작은 정부, 시장 자율 극대화’로 대변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도입을 꾀했고, 정치적으로는 당 개혁을 통해 파벌정치를 해체하려 했다. 하지만 관료지배적 국가조직의 부조리는 쉽게 척결되지 않았고, 고이즈미의 개혁은 자민당 내부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에 더해 그의 후임 총리가 된 아베 신조는 헌법 개정 시도, 교육기본법 개정 등 좌파 진영에 대한 정치 쟁점을 몰아세우는 공세적인 정책을 펼치며 민생 현안과 거리가 있는 이념에 치중된 사안들을 다뤘다. 자민당 정책의 실생활과의 유리는 오자와의 자유당과의 합병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대안정당’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2009년, 결국 자민당은 54년간 지켜오던 원내 1당 자리를 민주당에 내준다. 민주당은 사민당 계열이 주도한 좌파적 성향의 정당이었지만, 합당 과정을 통해 오자와 세력을 받아들이고 자민당과의 경쟁 과정에서 소수 정당들과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을 흡수하면서 중도 혹은 우익 계열의 정책을 펼치게 됐다. 1990년대 이후 공명당, 민사당 등의 중도 정당은 보수 계열로 이동하고 사민당과 공산당을 필두로 하는 좌파 진영은 자멸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 정당은 자민당‧민주당의 양당 중심 체제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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