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예정되어 있는 일정을 따르다 보면 계절의 들고 남조차 잊고 지내기 십상이다. 그럴 때면 일부로 작심하고 긴 호흡으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의 한가운데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몸과 마음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지난 시간을 반추해 보면, 잠깐이나마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서 나 자신조차 대상화되면서 현재의 위치와 미래로의 방향이 제시되는 혜안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대학시절 읽었던 서적에서 여전히 기억되고 곁에 두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지, 있다면 무엇인지를 살피는 과거로의 여행이 그동안 스스로 갈증 느꼈던 의문에 대한 눈밝아짐의 과정이었음을 우선 고백해 둘 필요가 있다. 현재도 내 책장에는 지난 시절 두근거리며 읽었던 빛바랜 서적들이 간직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충동적인 느낌으로 정신없이 다시 읽어보게 된 책이 학부시절 ‘문화인류학’ 강의교재로 사용한 <현대 문화인류학(권이구 편역, 1981)>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인류학에서의 핵심은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이며, 문화는 단지 다를 뿐이지 우열이 있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제4장 문화와 사람의 정의 중), 처음 이 개념을 설명 들었을 때의 감동과 흥분이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본 책은 편역자가 언급하였듯이 원저인 ‘문화인류학적 관점(Anthropology-biocultural view)’이란 책을 국내 실정에 맞게 재편집하여 문화인류학 개론서로 발간된 것이다. 그래서 문화인류학 전반에 대한 내용을 풍부한 현지 사례 중심으로 소개하여 이전이나 지금까지 이해가 비교적 용이하게 작성되었다는 점이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구성에 있어서도 각 장마다 요약과 추천도서와 용어해설의 부분이 있어 스스로 내용을 파악해 가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당시 강의를 해주신 강사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이 글의 내용을 읽어가며 매 순간이 충격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더욱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긴 생명력으로 서고 한 편을 늘 차지하고 있던 그 낡은 교재를 다시 열어보는 순간 지금의 내가 어디서, 어떻게 예정되어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결정적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쁨이었다. 가끔 학생을 비롯한 누군가 내게 현재의 전공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경우, 내 스스로도 우선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궁색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내가 전공으로 하고 있는 분야와 내용이 우연에 의한 선택이었는지 혹은 과거 내 경험과 느낌의 결과로 인한 필연에 의한 것인 지?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 무릎을 치게 만든 것은 학문으로서의 인류학에 대한 부분이 오늘날 내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학문분야와 매우 밀접하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깨우침이었다.

현재 내가 전공으로 하고 있는 분야는 소위 ‘역학(Epidemiology)’이라 하는 학문분야이며, 정의에 의하면 ‘인구집단에서 발병하는 질환의 분포 특성과 그 원인을 규명하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질병예방과 통제에 기여하는 과학’이다. 따라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게 되는 역학연구는 대부분 관찰연구로서 비교 연구 과정을 통해 진행하게 된다. 이 책에서 인류학의 과학적 특징으로 검증되어질 수 있는 관찰을 정리하는데 엄격한 방법과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과학이라는 점(본문, 31쪽)과 비교 연구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본문, 34쪽) 등을 언급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역학의 학문적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내가 현재 전공으로 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선택이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학부시절 이 교재와 강의에서 비롯된 필연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찾게 된 것이다.

내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일반화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현대 문화인류학>은 사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문화상대주의라는 점이 결국 편협한 사고보다는 열린 사고를 요구하게 됨), 사회 다양성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통해, 어쩌면 이러한 계기가 특히 미래 보건과학 전공자들이 자리매김 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사료된다.

이종태 보과대 교수․환경보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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