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신법학관에서 학문소통연구회 제 41차 워크숍이 열렸다. 이번 워크숍은 <심리학과 문학, 물리학과 의학의 설레는 만남>이라는 대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학제간 교류의 장이 되었다. 첫 번째로 강단에 선 남기춘(문과대 심리학과) 교수의 ‘인지신경과학 연구’에 대해 영어교육학자, 의학자, 어학자 등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또한 최원식(이과대 물리학과) 교수의 ‘무질서를 넘어서:물리학과 의학의 만남 연구’에 대해선 반도체 공학자, 의학자 등이 실현가능성, 연구방법론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 남기춘(문과대 심리학과) 교수 (사진=김연광 기자)
남기춘(문과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지신경과학을 통한 외국어 습득 기제’에 대해 발표했다. 인지신경과학은 외국어의 이해와 습득을 철저히 뇌의 작용에 기반해 설명한다. 남 교수는 먼저 인간의 뇌가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외국어 습득이 어려운 이유를 밝힌 후 최적의 학습 모델을 고안해냈다.




언어이해모형
언어 이해는 시각적 자료, 뇌의 처리작용, 배경 지식 등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진다. 문자가 시신경을 통해 입력되면 뇌는 단어를 철자적 단위와 음운적 단위로 나누어 인식한다. 이것은 언어이해과정에 이용되는 기본적 재료다. 본격적 이해 과정에 진입하면 뇌는 △상황모델 △담화 표상 △문장 분석기 등 세 가지의 기제를 작동시킨다. 상황모델은 언어의 맥락적 정보다. 남기춘 교수는 이를 “어떤 상황에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지 파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담화 표상은 단어와 구, 절 등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가령 ‘철수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라는 문장에서 ‘철수는 배가 고프다’와 ‘밥을 먹었다’가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문장 분석기는 문장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 접사 등의 문법적 정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세 작용에는 ‘추론 과정’이 필수적으로 개입되는데 뇌는 텍스트에 나타나 있지 않은 정보를 이 추론과정을 통해 메운다.

한편, 언어를 정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뇌에 상황적 지식, 언어적 체계, 어휘집, 철자 체계 등의 정보가 미리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설명한 상황 모델, 담화 표상, 문장 분석 등의 작용이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남 교수는 “이것이 바로 인지 심리학이 언어학, 문학 등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외국어를 못하는 이유

남 교수는 외국어를 잘 습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독특한 실험을 설계했다. 실험 집단은 사과 그림과 문자가 결합된 네 가지의 화면을 보고 ‘사과’또는 ‘APPLE’이라고 말해야 한다. 세 화면은 사과 그림과 ‘과일’ 문자(A), ‘사과’ 문자(B) ‘신발’ 문자(C)가 결합되어 있고 한 화면은 사과 그림만 있다(D). 가장 먼저 화면을 보고 한국어로 ‘사과’라고 말하라고 했을 때 실험집단의 반응 시간은 B-D-C-A 순으로 짧다. B는 말할 단어와 같은 ‘사과’ 문자가 제시돼 있어 촉진(facilitation) 작용이 일어나 반응 시간이 가장 짧다. 반면, A는 ‘사과’와 의미적 연관성이 있는 비슷한 단어 ‘과일’이 제시되어 언어 산출을 방해(inhibitation)하기 때문에 반응 시간이 지연된다. 한편 화면을 보고 외국어인 ‘APPLE’을 말하라는 과제가 제시된 경우 반응 시간은 D-B-A-C 순으로 짧다. 이 경우 ‘사과’가 제시된 B는 모국어로 말할 때 촉진요소로 작용한 것과 달리 ‘APPLE’을 말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해 반응 시간이 느려진다. 또한 ‘과일’이 제시된 A는 오히려 APPLE 산출의 촉진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듯 모국어를 산출할 때와 외국어를 산출할 때 각 화면에 따른 반응 순서가 다른 것은 인간의 뇌가 서로 다른 시스템을 통해 두 언어를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남 교수는 “외국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 fMRI(기능성 자기공명영상) 결과를 보면 다른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말했다. 또한 ‘사과’ 문자가 제시됐을 때 ‘APPLE’이라고 말하기까지의 시간이 지연된 것은 외국어를 습득·이용할 때 한국어가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 교수는 “외국어를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뇌 속에 입력된 모국어 기제가 외국어 처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라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영어를 한국어로 이해하지 않고 영어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최적의 영어단어 학습모델
남 교수는 위의 실험 결과에 기초해 최적의 영어단어 학습모델을 만들었다. 남 교수의 학습모델은 영어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영영사전과 같이 영어적 의미 자체로 기억한다. 또한 읽기·쓰기·말하기·듣기를 통합하기 위해 단어적 형태와 음성적 형태를 연결했다. 뿐만 아니라 시간적 간격을 두고 학습하면 암기 효과가 커진다는 ‘간격효과(spacing effect)를 적용해 단어 암기 중간 중간 일정한 텀(Term)을 두었다. 최근 대학생 53명을 대상으로 남 교수가 실시한 유효성 실험에 따르면 그의 학습 모델이 외현기억, 암묵적 기억, 단어 인식 모두에서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남 교수는 “위의 학습 모델을 상용화해 사회에 선보일 계획”이라며 “외국어 습득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지신경과학과 영어교육·의학의 소통
토론자로 나선 어도선(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인지신경과학을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몇 년 전 좌뇌, 우뇌를 구분 짓는 언어 습득이 인지신경과학계에서 강조되면서 관련 학습 모델이 쏟아져 나왔다”며 “그러나 요즘은 뇌 영역의 구분이 크게 잘못됐다는 관점이 우세하다. 교육에서 특정 방법론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생태학적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아울러 “남 교수가 제시한 어휘학습모델은 사전적 습득에 국한되어 있다. 실제 문맥과 상황에서 습득한 단어를 사용하는 수준까지 연구가 확대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건우(의과대 신경과) 교수는 “환자들을 치료할 때 fMRI, CT 영상을 보면 뇌는 하나의 일을 하기 위해 주변 기능을 철저히 죽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며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부가정보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의 연구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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