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이 러시아 문학가에게는 ‘잔인한 천재’, ‘인간 심연의 탐구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화두를 통해 궁극적으로 휴머니즘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일 석영중(문과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본교 영미문화연구소 주최 특강 ‘명작과 저자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콜로키움’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원의 리얼리즘’에 대해 강연을 진행했다.

돈, 살인, 치정의 드라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우리나라에서 3권으로 나뉘어 출판될 정도로 긴 소설이다. 그럼에도 초반부를 넘어가면 어느 순간부터는 책장이 잘 넘어간다. 작품 속에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전매특허 3요소인 돈, 살인, 치정이 잘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살인과 치정으로 가는 매개체는 늘 돈이 차지하는데, 이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개인사가 상당히 반영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지한 철학자상의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늘 돈에 쪼들리고 도박중독으로 고생했던 생계형 작가였다. 이렇다보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소설보다는 흥행을 위해 멜로드라마의 기본요소에 충실한 직관적 소설을 다수 집필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이런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축제의 일종인 ‘카니발’과 접목시켰다. 바흐친은 카니발의 의미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일탈이 허용되는 ‘해방’으로 해석했다. 그가 해석한 카니발의 두 번째 함의는 ‘뒤집힘’이다. 바보가 왕이 되고, 남자가 여장을 하는 등 뒤집힌 리얼리티의 관점이다. 바흐친은 이 두 가지에서 죽음과 갱생의 미학을 발견하고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적용하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살인‧치정사건은 질펀한 카니발이며, 이는 갱생과 구원을 위한 전초작업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처럼 구원을 철학적, 사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인간사의 이면을 통해 날것으로 끌어냈다.

개인의 구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맏이인 드미트리가 아버지 살해 누명을 쓰고, 끝내 결백을 증명하지 못한 채 유배를 떠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원의 문제를 드미트리라는 인간 개인의 차원에서 다룬다. 작중에서 드미트리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인물이다. 그런데 과거를 청산하고 그루셴카와 결혼해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3000루블이 필요하다. 구원에 돈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3000루블은 190번이나 언급된다. 특정한 액수가 이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은 참 이례적이다. 이 3000루블은 아버지의 살해와 드미트리를 연결 짓는 강력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약혼자에게 빌린 돈 중 일부를 유흥에 탕진했지만 사람들은 아버지에게서 갈취한 3000루블로 오해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실’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작품 전체를 통해 나타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을 사실에 집중한 리얼리즘 작가라고 강변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사실이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사실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초반에 3000루블을 원하고, 3000루블이 있어야 갱생할 수 있다고 울부짖던 드미트리는 작품의 말미에서는 그 3000루블 없이도 갱생의 길에 접어든다는 점이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유배길에 오르지만 종국에는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눈을 뜨고 구원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의 드미트리는 돈과 여자를 위해 아버지를 살해한 파렴치범이 돼 갈수록 추락하지만, 그의 내면은 자기 자신을 찾고 성찰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

인류의 구원
마지막 시점에서의 드미트리의 갱생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타나는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신학적 의미를 지닌 인류의 구원이라는 거대담론에 대한 논의를 제공한다.

냉철한 무신론자인 둘째 이반은 대심문관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냉소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미트리 개인의 구원 이야기와는 달리 거시적 관점에서 인류의 구원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대심문관이 강조하는 ‘기적으로부터 믿음이 나오는가, 믿음에서 기적이 발현되느냐’는 화두는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적에서 믿음이 나오는 건 절대 아니며, 진정한 믿음은 믿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 기적과 믿음의 문제는 인신(Man-God)의 개념을 통해 자세히 설명된다. 인신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인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이반으로 표상된다. 그는 대심문관이 말했던 기적, 신비, 그리고 권위를 바탕으로 대중을 이끄는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 이반은 이복형제 스메르자코프의 아버지 살해를 암묵적으로 방조했다. 생명의 가치를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성만 생각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인신이라 일컫는 자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은 것은, 심지어는 그것이 살인이어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 하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큰 반향을 지니는 주장이다. 첨단과학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을 것인지, 생명윤리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허용돼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거대담론에 대해서 과연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구원이라는 거대담론 자체를 거부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긍정적인 인물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인(God-Man)계열의 인물들은 결코 인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한 ‘한 알의 밀알’ 이야기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의 대상에서 한 사람으로 초점을 변경하라고 권한다. 인류 구원의 반대는 한 사람의 구원이다. 작중에서 그루셴카는 이야기를 통해 단 한 가지라도 진실된 선행은 구원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적, 신비, 그리고 권위의 거창함에서 벗어나 한 사람, 그리고 하나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들은 인류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지만 정작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도 사랑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관념적인 말에서 벗어나 옆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기 시작하자고 권유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셋째 알로샤의 꿈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가 펼쳐진다. 어떤 가난한 마을의 혼인잔치에 그리스도가 갔는데 술이 떨어지자 물을 술로 바꿔주었다는 이야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의 논리를 가나의 혼인잔치에 나오는 ‘기쁨의 신학’을 통해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가 펼친 변론은 빵을 넘어서는 자유의 문제로 이어진다. 작중에 등장하는 돈이 필요함에도 자존심 지키려 유혹 거부하는 가난한 하급관리, 그리고 3000루블이 아닌 경험을 통해 구원받는 드미트리는 자유의 힘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세상에서 신의 자비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며 모든 사람이 구원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는 부당함을 수용했다. 그 바탕에 깔린 것은 ‘만인은 만사에 있어서 만인 앞에 죄인’이라는 공동체의식이다. 모든 이들이 공동체정신을 바탕으로 서로간의 책임을 다하는 ‘구원의 공산주의’. 이것이 그가 구원으로 내놓은 최종적인 대안이자, 이상향이었다.
▲ 문과대 노어노문학과 석영중 교수님이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김연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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