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노동절은 노동자의 근로조건개선과 지위향상을 위해 각국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다지는 날이다.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진 노동절의 모습을 되짚어보며 우리나라의 노동사를 살펴봤다.

 

1923년 노동절 시작에서 1959년 폐지까지
1923년 5월 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노동절을 기념한 날이다. 조선노동연맹회는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를 구호로 노동절을 주최했고 강연회를 진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휴업 시위 △강연회 △전단지 살포 △야유회 △운동경기 등이 이뤄졌고 다수의 지방 직공들은 휴업했다.

1920년 대 초반 일제는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방식에 변화를 줬으나 식민지 수탈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벌어들인 자본으로 조선에 진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1920년, 일본은 한국에서 회사를 설립할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한 회사령을 폐지했다. 또한 여유가 없던 1910년대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선별적으로 지원하기위해 내세웠던 회사허가제를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신고제로 바꿨다. 관세까지 철폐되자 일본자본은 조선에 대거 유입돼 식민지 공업을 형성했다. 이때 일본 자본가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다. 이에 반해 노동자의 임금은 생존비에 미치지 못했다. 16~18시간이 일반적인 노동시간이었고 휴일은 1년 중 10일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노동문제가 사회의 큰 이슈가 되며 노동단체가 급증했고 1922년 10월 15일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됐다. 1928년 원산 총파업을 겪은 후 1929년 일본은 전국에 노동절 집회를 금지했으나 각지에서 기념식이 진행됐다. 1937년 이후부터 해방까지 중일전쟁을 계기로 황국신민화 정책이 강화되며 노동절은 단절됐다.

1946년 해방 후 첫 노동절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최로 20만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당시는 해방이후 국내 경제상황이 불안정했다. 1945년 5월 대비 1946년 5월에는 임금상승정도는 물가상승의 13분의 1에 불과했다. 이후 1948년부터 58년까지는 노동절 집회가 당시 관변단체였던 대한노총 주도하에 진행돼 전체 노동자의 뜻과는 달리 노동자가 이승만정부와 자본가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날로 전락했다. 대한노총의 기존 노동절 폐지 건의로 1959년부터는 3월 10일이 노동절이 됐다.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에선 국가발전을 명목으로 노동자탄압이 강하게 이뤄졌다. 1963년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5월 1일 노동절을 불법화 했다. 노동절의 명칭은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고 모범근로자상을 시상하는 날로 노동자들의 충성을 요구했다.

1989년 노동절 부활의 시작
196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급속한 전개에 따라 자본축적이 확대됐다. 그러나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노동력 절감이 이뤄지며 노동과 자본의 관계모순이 심화됐다. 1980년대에는 대외 종속이 심해지고 사회 내 자본 독점이 강화돼 부의 편재와 경제 자본의 해외 유출이 발생됐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절대적 상대적 빈곤에 더 깊이 빠졌다. 자본가는 자본의 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요구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따라 산업재해 발생이 늘어났고 고용형태의 불안정성이 발생됐다. 1970년 전태일 열사분신과 1979년 YH무역사건 등은 노동운동을 촉발했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에 대해서만 투쟁할 뿐 근본적 구조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했고 노동절의 부활도 논외가 됐다.

1989년 세계 노동절 100주년을 계기로 노동절 회복에 대한 시도가 행해졌다. 노동악법 철폐를 구호로 한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찰력으로 인해 무산됐다. 그러자 5월 1일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는 총파업에 들어가며 그들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했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초기에 노조의 육성과 노사공영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고 점차 노동쟁의에 대해 적극적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 지시’를 내리고 탈법적, 파괴적인 집단행동과 각종 이익 집단들의 폭력적인 집단시위를 막았다. 1989년 4월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 하에 설치된 공안합수부가 노동운동을 통제하는 수단이 됐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갔다. 이는 노동절을 전후해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 △전교조 지원투쟁 △노동법개정 투쟁 등이 나오는 배경이 됐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주최한 전국 노동자대회에서 노동운동 탄압 분쇄와 민중 기본권 쟁취를 주장했다. 1991년에는 강경대 열사 사건으로 ‘살인·폭력 정권퇴진’이 구호로 나타났다. 1992년 정권 말에는 정권퇴진 구호 대신 △총액임금제 즉각 철회 △공공요금 및 독과점 가격인상 억제 △노조의 정치활동금지 철폐 △전노협 전교조 합법화 가 나타났다. 노태우 정권 시기의 노동절에는 그 동안 억눌려 있던 다양한 노동의 문제들이 구호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며 1994년 노동절 집회가 공식적으로 합법화됐다. 이날 집회에선 경제투명화와 실질적 노동조합을 위해 △금융실명제 실시 △30대 재벌 총수 재산공개 △복수노조와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삭제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보장 등이 요구 됐다. 이런 구호의 경향은 정권 말까지 이어졌다.

한국 경제 위기 속 노동절
김영삼 정권의 임기가 끝나가는 1997년 11월에 외환위기 닥쳤다. 2월 13일 임시국회는 정리해고를 법제화하고 근로자파견법을 제정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노정합의 및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철수를 되풀이하며 저항하는 사이 자본과 권력의 구조조정은 계속해서 진행됐고, 임금동결과 삭감이 이뤄졌다.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 저항했으나 구조조정 반대투쟁엔 공권력이 투입돼 노조간부가 대량 구속과 징계가 이뤄졌다. 2000년 대 들어 외환위기를 넘긴 후에도 구조조정은 일상처럼 여겨졌다. 노동시장에 실업사태는 여전했다.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노동 강도 강화 위협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는 빈곤과 차별로 고통 받았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임금소득 불평등은 커졌다.

1998년에서 2002년까지의 노동절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 시기 노동절에는 △정리해고 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 행위 척결 등이 구호로 나왔다. 2001년에는 경제상황이 나아진 것이 없자 △김대중 정권 퇴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를 구호로 전국에서 노동자대회가 개회됐다.

2003년 노무현 정권 때는 변형근로제가 도입됐다.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가 사회에 완전히 정착됐다. 2003년 노동절에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 △주5일 근무제 도입 △노동3권 보장의 주장이 이뤄졌다. 이런 구호의 경향은 정권 말까지 이어졌다. 다만 2005년부터 ‘무상의료ㆍ무상교육 쟁취’가 거론되고 세계경제에 따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의 구호가 추가 됐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은 유지됐다. 다만 매년 발생하는 사회 사건에 따라 구호가 추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2009년에는 한·미 FTA가 진행됨에 따라 한·미 FTA 비준 중단의 요구가 이뤄졌고 시위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진압과 폭력사태가 발생해 독재타도의 요구가 있었다. 용산참사도 이 때 발생돼 용산참사 책임자 처벌 등도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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