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마를 봤다. 여자 주인공이 또 불치병에 걸렸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뜨겁게 사랑하던 두 연인은 종영만 가까워 오면 한 쪽이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막장이라고 불평을 터트렸지만, 나는 어느새 여주인공의 슬픈 운명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별을 의미하기에 인간 삶의 슬픔, 애환 등의 뿌리가 된다.

  흔히 죽음을 매 순간 의식하여 더욱 치열하게 살자는 말을 듣는다. 일상에 매몰돼 죽음을 무시하는 대신 당당히 직면하자는 것이다. 이번에 ‘If I die tomorrow’행사를 취재하면서 우리 사이에 그런 강박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서를 쓴 사람들은 대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행사를 통해 죽음과 의연하게 마주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해져 보자. 죽음과 직면하는 일이 가능한가? 유서를 쓰고 영상편지를 남긴다 해도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직면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과 대면하는 일은 정말 죽음을 목전에 둘 때만 가능하다. 그 때에 우리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일지, 죽기 싫어 발버둥 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는 것은 두렵다. 인간은 모두 미지의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보고 온 이는 없고 간 이만 있는 죽음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의 진심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은 사람들은 “죽음은 인생의 아름다운 저녁이다” 따위의 말을 만들어 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 하더라도 초조와 불안 때문에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정해놓고 책을 읽으면 더 치열하게 읽을지는 모르나 압박감 때문에 책의 내용을 충분히 즐길 수 없을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다. 단지 언젠가 내가 죽음과 맞닥 들였을 때 큰 후회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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