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택민 사범대 교수·역사교육과
  598년 수 문제가 고구려 평원왕에게 보낸 국서를 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국서에서 수 문제는, 첫째 고구려가 말갈을 마구 부리면서 거란을 압박하여 수와 통교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는 점, 둘째 수의 병기기술자를 몰래 유인해 가고 있다는 점, 셋째 고구려에 보낸 수의 사자를 감금하면서 정탐을 금하고 있다는 점, 넷째 수의 변경을 침공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는 점, 다섯째 사신을 보내 수의 정보를 밀탐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이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공격하여 멸망시킬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수 문제가 고구려왕에게 시정을 요구한 사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해석해 보면, 고구려는 주변의 민족세력들과 견고한 연맹을 형성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수의 병기제조 기술자를 유인하여 군사력을 확충하며 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적정을 교란시키는 등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었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당시 수는 삼백 수십 년 동안 분열해 오던 중국을 통일하여 거대한 영토를 확보한 위에, 서쪽의 토곡혼과 북방 초원의 돌궐까지 제압하여 국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王은 요하(遼河)의 폭이 장강(長江)에 비해 어떠하며, 고구려의 인구는 진국(陳國)에 비해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라고 하여, 수는 양쯔강 같은 장애물도 쉽게 넘었으니 그보다 훨씬 좁은 요하 정도는 장애물이 될 수 없고, 고구려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진나라를 손쉽게 멸망시켰는데 고구려가 무엇을 믿고 굴복하지 않느냐고 노골적으로 위협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의 영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고, 인구로 말하면 고구려는 많아야 100만을 넘지 않았을 것이니 수의 4600만에 비하면 1/46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수와 고구려의 대결은 수의 참패로 끝났다. 즉 598년 문제 때 30만을 동원한 침공, 612년 양제 때 113만을 동원한 침공 및 그 뒤 두 차례의 대규모 침공 모두 수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수의 패배는 고구려의 군사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원거리를 진격해 온 공격자의 자기 피로에 따른 자멸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옳다.

  수의 침공을 막아냈으나 고구려도 계속되는 방어전의 피로증을 견딜 수는 없었다. 46배나 많은 인구를 가진 수의 총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은 군대로 편제되어야 했고, 민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담했다. 따라서 당시 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최후 이십 수년을 지배한 연개소문의 철권통치에 의해 그 체제는 유지되었으나 그것도 최후의 몸부림에 불과했던 같다. 마지막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당과 신라로 망명하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어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 그 반증이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올봄은 날씨가 고르지 못했다. 이에 못지않게 남북관계도 꽉 막혀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나날이었다. 아직도 개성공단은 막혀 있고 남북 사이에 대화의 물꼬가 트이지 않고 있지만, 그나마 날선 공방이 잦아든 것을 보면 한 고비는 넘긴 듯하다. 이렇듯 남북관계가 긴박하게 돌아갈 때면 습관적으로 천삼백여 년 전으로 돌아가 삼국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을 되돌아보게 될 때가 많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고구려의 승전은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었고, 멸망의 전조였다. 광활한 요동 땅이 우리 역사의 장에서 멀어진지 1350년이 되어 가는데, 다시 한반도 북쪽을 지배하고 있는 강권통치자들은 병영국가체제를 구축하면서 핵무기로 무장하고 세계의 어떠한 강대국과도 대결할 수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렇듯 북한의 위정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해서 실험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작금의 정황을 보고 들을 때마다 고구려가 수로부터 병기 기술자들을 유인하면서 수와 전면 대결을 주저하지 않던 상황이 겹쳐 떠오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 땅이 우리 역사에서 오래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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