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군사정전협정 체결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다. 60년의 분단 기간 동안 남북 관계는 갈등과 협력의 변곡선을 그리며 매년 변화를 지속했다. 치열한 이념 논쟁을 펼치던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냉전의 종식은 북한 대외전략의 기본 방향 수정을 불러왔다. ‘멈춰 있다’며 비판을 받는 북한의 외교 정책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한 가운데서 어떤 변화를 보여 왔는지 지난 20년간 북한의 외교 정책을 남북관계 중심으로 짚어봤다.

전두환 정부 : 북한의 정책노선 전환
한국전쟁 이전 북한의 외교 정책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라는 궁극 목표를 지향했다. 북한은 한국의 고립화와 북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단일 조선 정책을 기본 외교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그러나 동서 냉전구조 붕괴, 한국의 북방정책 추진 등 국제정세 변화와 내부경제 어려움이 가중되자 북한은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노력 등 현실주의적 외교노선으로 선회했다.

  1980년 10월 김일성 주석은 자주·친선·평화를 북한 외교정책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자본주의 국가와도 친선 관계를 맺겠다는 ‘대서방외교 강화 방침’을 제시했다. 1984년 9월 초 남한에 발생한 홍수로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 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 천 50만m등의 지원을 제안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북측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지수(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제안이 인도주의를 표방한 고도의 외교 전술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북한은 폭탄테러 사건으로 남한 및 국제 여론에게 외면 받는 상태였다. 이 교수는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은 북한의 제안이 그들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부각 시킬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 남·북 UN 가입

남한이 1990년 9월 30일 소련과의 수교를 맺고 10월 20일 중국과 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하자 북한은 위기감을 느꼈다. 김일성 주석은 1990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에 특사를 파견하고 중국과의 유대를 강화시켜나가고자 했다. 1991년 9월 18일 제 46차 UN총회에서 남북은 별개의 의석으로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남북이 단일 의석으로 UN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별개의 의석으로 UN가입을 할 경우 국제적으로 두 개의 조선임을 공표하고 영구분단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북한은 단일 국가와 단일 민족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1992년 8월 24일엔 한·중 수교가 체결된다. 이에 북한은 12월 중국에 대한 외채상환요구를 거부했으며 중국 접경지역을 통제하고 수시로 중국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수시로 교류와 갈등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양 측은 군사지도자간 만남을 수시로 가지며 기존의 동맹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매년 실시했던 최고지도자 간 상호 방문은 한·중 수교 이후 2000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공식 중국 방문이 있기 전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중국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역을 확대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급격히 늘려갔던 반면 북한은 전통적인 소련의 사회주의 모델을 견지했다. 이에 북·중관계는 내외정책 차이로 인해 급속도로 냉각 상태에 빠졌다.

김영삼 정부 :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 사후 북한은 대미외교를 중심으로 중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호열 한국정치학회회장은 “냉전 체제가 종결됨에 따라 북한 체제의 안전 보장 및 경제지원 도출 등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중 수교 이후 북한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국의 노력으로 양국의 교류는 어느 정도 회복세를 탔다. 이 시기에 중국은 정치·외교적으로 북한에게 최대한의 지지와 협조를 보였다. 중국은 북한에게 대량의 경제 원조를 했으며 특히 북한 내부의 식량 위기 때 조건 없는 원조를 했다. 이에 1996년에 이르러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눈에 띄게 개선됐다.

김대중 정부 : 햇볕 정책의 시작

김대중 정부는 1970년대 서독의 동방 정책에 기초한 ‘햇볕 정책’을 실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이후 북한은 <로동신문> 논평에서 ‘햇볕 정책’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선 ‘금강호’가 처음 출항하며 남북관계는 평화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 교수는 “정치군사적 문제보다 상대적으로 손쉬운 경제 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이를 통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보자는 남한의 전략”이라며 “이는 북한의 대남 인식과 남한의 대북 인식이 어느 정도 긍정성을 띄게 되는 시작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으로 인한 제1연평해전이 발발하자 햇볕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2000년 6월 13일부터 이틀 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됐으며 15일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됐다. 그러나 제2연평해전이 발생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 강승규(인문대 북한학과) 교수는 대화와 갈등이 반복되는 북한의 대남 정책을 ‘도발을 하면서 대화를 제의하는 이중전략’으로 평가했다. 강 교수는 “대남도발을 연구한 결과 대남도발을 많이 했을 때 대화제의 또한 많이 유도했다”며 “협력을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협력을 하는 교묘한 정책을 쓴다”고 말했다. 남한을 교란시켜 남남 갈등을 유도해 자신들의 실리를 최대한 챙긴다는 말이다.

노무현 정부 : 개성공단 착공

이 무렵 북한은 그 동안 군사력을 바탕으로 펼쳤던 외교 정책을 ‘선군외교’라 명명하며 본격적으로 ‘선군혁명외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을 기반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국정기조로 삼았다. 2003년 6월 30일 개성공단 1단계 건설에 착공했으며 9월 현대아산의 금강산 육로관광이 개시됐다.

  참여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의 관계에 크게 진전을 보이지 않았으나 북한이 2006년 7월 5일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10월 9일 핵 실험을 강행한 이후 6자회담을 중심으로 핵 폐기에 집중했다.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이유는 북미간 적대적 관계에서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중국은 북한이 2차 핵 실험을 시도하자 기존의 태도를 바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양국의 관계는 다소 소원한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2009년 10월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며 양 국은 전통적 우호 협력 관계를 회복한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고 4일 6.15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2007 남북 정상선언문’을 체결했다. 하지만 2008년 7월 11일 관광객이 북한군의 피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잠정 중단됐다.

이명박 정부: 북한의 무력 도발 심화

이명박 정부 때는 북한의 도발이 유난히 많았다. 2009년 5월 25일 북한은 2차 핵 실험을 강행했으며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해 해군 46명이 전사했다. 2010년 11월 23일엔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연평도 주민들이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승규 교수는 연평도 포격 사건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북한이 체제 유지를 하기 위해’라고 분석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9년도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우 30년 정도 김일성 주석 아래서 2인자로 후계자 역할을 하며 김일성 주석이 죽기 전 외교나 국방 쪽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으로 내정된 후계자였기에 군을 통치할 수 있을 만한 경력이나 실적이 없었다. 강 교수는 “후진국의 경우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군을 우대한다”며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도발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실적을 쌓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행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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