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의 새해 예산안을 제출하면서 국회에 직접 출석해 연설하기로 한 것은 뜻깊은 일이다. 사람에 따라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겠지만 국내외로 어려움이 겹친 이 시기에 대통령이 국회와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을 나쁘게 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취임한지 6개월이 지난 현재, 리더십의 위기를 겪고 있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대통령이 헌법의 정신과 원칙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일이다. 우리 헌법 제81조는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해 발언하거나 서한으로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이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지 않았다.

국회 출석 발언권을 통해 입법이나 일반정책에 관해 국회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국회 출석을 꺼리고 기피하는 경향이 많았다. 예산안 제출에 따른 정부의 시정연설도 대통령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제헌국회에서 이범석 총리가 처음 대독한 이후 지금까지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첫해에 직접 국회에 가 예산에 대한 시정연설을 한 것이 예외일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막강한 국회를 상대로 민주화와 국민의 정치참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그는 3당 합당을 통해 인위적으로 다수당을 만들어 국회를 다시 기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는 국민의 대표로서의 국회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삼권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내각제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국회와 정부가 밀접하게 협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대통령들은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국회 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펼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를 겸함으로써 국회의원의 공천권과 주요 당직의 인사권을 배경으로 사실상 국회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 시대의 대세는 국회가 헌법상의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통령은 여당의 총재를 겸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당정분리의 원칙을 표명하고 있는 처지이다.

더구나 야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대통령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국회와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지만 여당과 야당, 그리고 국회와 정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가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갈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그 전 대통령처럼 새 정당을 만들어 다음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어 보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과욕이기 쉽다. 민주화가 이룩된 이후 지난 네 차례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은 여소야대를 선택했다. 대통령의 권력집중을 견제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토론을 강조하는 노 대통령인 만큼 국회를 국정 토론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는 국가예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일이다. 예산이란 새해  국가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예정과 계획을 말하며 ‘국가시책의 금전적 표현’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즉 국가의 주요정책이나 사업계획은 예산을 통해 구체화되고 실제행동에 옮겨지게 된다. 국가의 기능이 확대되고 공공의 사회적 욕구가 증대된 현대국가에 있어서 국가 예산은 그 규모도 방대하고 구조 또한 복잡하다. 특히 국가 예산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국민경제와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국가경제의 성장과 발전시키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의 우선순위가 함께 활발히 논의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국내외 정치. 경제 상황과 그 전망, 예산편성의 배경 및 중점시책 등 국정전반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게 된다. 시정연설을 통해  국민은 나라살림의 대강의 방향과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 정부는 한국을 동북아의 중심축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찬 목표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이 목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산에 반영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시정연설을 통해 모처럼 대통령다운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헌법의 정신대로 국정의 큰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며 구체적인 정국의 운영과 국정의 집행은 총리와 내각에 맡기는 그런 듬직한 대통령의 모습 말이다.

이종률(통일시대 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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