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의는 제주대 SSK ‘자연의 공공적 관리와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연구팀의 발표가 중심이 됐다. 이 회의는 앞서 정의한 공공성의 역사적 흐름을 바탕으로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고 사례를 탐구했다.

공동자원의 개념 재정립
처음으로 발표한 최현(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자연의 수탈이 강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논의를 전개했다.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할 자연이 사유화되고 개발돼 공공성이 훼손되면서 환경오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인간과 자연의 호혜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자원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학자 오스트롬(Ostrom)의 공동자원 개념을 받아들이되, 수정·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롬의 개념에 따르면 공동자원의 주 특성은 비배제성과 경합성이다. 공동자원은 한 사람이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줄어들어 사람들 간의 경쟁을 초래한다.

  그러나 잠재적 사용자를 배제할 수 없어 다수가 공유한다. 최 교수는 이러한 오스트롬의 정의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원의 배제성과 비배제성은 사회적 속성인데 이를 자원의 물리적 속성으로 치부해 잠재적인 사용자를 배제하고 무분별한 사유화를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자원을 시민의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자원은 그 자체로 비배제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약속에 의해 합의된 산물이다. 이에 홍성태(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오스트롬의 정의는 현실적으로 너무 낡고 미약하다. 그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공유재를 지킬 것인가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가 현대의 거대 경제를 보완 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최현 교수는 “내 연구는 공공성의 올바른 실현을 위한 담론 수준”이라며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 민주적 통제 등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공동체(commons) 중심의 생태적 공공성
두 번째로 발표한 제주대 SSK 사업단 김자경 박사는 동양에서 공(公)과 공(共)의 사상을 바탕으로 지역공동체인 ‘커먼스(commons)’의 개념을 정립한 후 생태적 공공성까지 논의를 펼쳐나갔다. 김 박사는 “‘共’은 ‘함께, 공동의, 다수의’를, ‘公’은 처음에는 지배계급의 영역을 의미하다가 점차 공정성, 공평성 등의 윤리적 개념으로 확장돼 ‘共’의 의미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즉 ‘公’은 윤리적 정당성과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 박사는 커먼스를 ‘公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한 기반의 共’이라고 정의했다. 함께 하는 사회를 통해 윤리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公과 共의 조화를 통해 안정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커먼스는 예부터 한, 중, 일에서 공공성의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는 동아시아 3국의 산림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후기 백성들은 지역공동체별로 송계(松契)를 조직해 산림을 마을 공동으로 관리했다. 중국에서는 산림자원의 공공성을 보존하기 위해 특정 기간 동안 경작, 방목, 땔감 채취 등을 전면 금지하는 ‘봉산(封山)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커먼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이었다. 일본의 산림은 ‘입회권’을 통해 관리됐다. 입회권은 마을 공동체가 일정한 산림자원을 소유하고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다. 김자경 박사는 여기서 나아가 커먼스를 바탕으로 하고, 주민들의 소통이 자연환경으로 확장된 ‘생태적 공공성’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제주대 SSK 사업단 정영신 박사는 “공공성은 정치적 개념이고 공동자원은 자원의 영역이다. 자원의 영역을 공공성이 어떻게 포괄할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고대시기 ‘信’ 관념의 변화
마지막 발표자인 정창원(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공공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자원의 공유는 사회적 약속인 ‘신(信)’의 관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춘추전국시대에서 진나라로 이어지는 고대 중국에서 ‘信’ 관념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처음 ‘信’이 공공성을 지키는 윤리적 개념으로 정착된 것은 춘추시대다. 춘추시대는 예악사상이 붕괴된 혼란한 사회였으나 ‘信’의 관념이 소국가들을 구속했기에 도덕정인 정치가 가능했다. 이 시기에 선진 유가는 ‘信’을 명확한 윤리사상으로 적립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信’이 약해져 배신과 권모술수 등이 난무했다. 정 교수는 이 변화를 두 가지 신흥세력인 종횡가, 병가의 출현과 연결 지어 설명했다. 종횡가, 병가의 가장 큰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이에 그들은 신의를 지키고 공공성을 중시하는 ‘信’을 중시하지 않아 전국시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혼란은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종식된다. 이후 ‘信’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진나라를 건국한 법가는 ‘信’을 도덕적인 개념으로 정의한 선진 유학파와 달리 국가통치의 도구로 삼았다. 정창원 교수는 “진나라의 ‘信’은 형벌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는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조은상(배재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먼저, 정 교수가 논의한 역사적 ‘信’ 관념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일반 민중들의 관념도 포괄하는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信’ 관념의 변화를 역사적 맥락에서만 파악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철학적으로도 고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 2회의의 사회자인 정일준(문과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국제 관계의 ‘信’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信’은 국제 관계에서도 공공성을 실현하는 핵심 관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信’ 관념이 공공성의 연원이라는 사실에는 논의에 참여한 모든 학자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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