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 속에 물이 담겨 있다. 여기에 개구리 한 마리를 넣고 비커를 가열한다. 서서히 올라가는 온도에 개구리는 제 몸이 익는 줄도 모른다. 한참이 지나서야 뜨거움을 느끼지만 이미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개구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삶아진 개구리 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유명한 실험은 자극에 대한 감각기관의 적응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즘 뉴스를 보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다. 국가기관이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가 하면 사회 유력인사들의 조세회피 의혹이 일기도 했다. 사안의 중대성을 따져 보면 한바탕 난리라도 나야할 것 같지만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하다. 사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열변을 토했을 법도 하지만 이젠 무서울만치 냉소적이고 담담한 자세로 지금의 모습을 방관한다. 언젠가부터 수없이 많이 보고 들어 온 사회의 부조리에 의식의 감각기관은 비커 속 개구리처럼 자연스럽게 적응해버렸다. “이런 일 한두번이야. 세상이 원래 그런거지”라며 혼자 내린 결론은 이제 막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한 대학생에게 매우 뿌듯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볼때면 부끄러우면서 한편으론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는 흔히 “괜히 나서서 다칠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두려운 것은 다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나서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개구리가 비커 속에서 가만히 있었던 이유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비커를 깨고 나올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구리도 이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물이 뜨거울수록 비커의 벽이 더 잘 깨진다는 것을. 반복된 부조리에 익숙해져 감각조차 잃어버린 내 모습을 스스로 반성해본다. 지성 있는 대학생이라면 마땅히 비판의 온도계를 꼽고 주변의 온도에 예의주시해야 하지 않을까. 물이 끓어 넘치기 전에 비커를 깨고 나올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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