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본관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본관은 본교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본관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 보성전문대학을 인수하고 1933년 안암동에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다. 현재 본관은 행정기능을 주로 담당하지만, 신축 당시에는 행정, 수업, 접견 등의 종합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유구한 본관의 역사 속에 차곡차곡 쌓인 사건들을 들춰보았다.

 

역사적 에피소드

- 오태주와 명안공주의 무덤이 위치해
조선 후기 최고의 문벌 가운데 하나였던 해주 오씨 가문의 해창위 오태주와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의 무덤이 본교 본관 자리에 있었다. 한문학을 공부하며 옛 사람들이 살던 땅에 대한 자료를 모은 이종묵(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조선 후기 고려대 뒷산의 종암일대는 해창위 오태주의 땅이었다”며 “오태주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이들의 무덤이 고려대 본관자리였다”고 밝혔다. 연대가 정확히 나오진 않지만, 이들의 무덤은 이장돼 현재는 안산에 위치해 있다.

- 휴전이후, 미군의 주둔소가 된 본관
휴전협정 조인 이후 1953년 8월 16일 본교는 대구 원대동의 임시교사(校舍)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행히 석조 건물로 지어진 본관과 도서관은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면했다. 그러나 본교에 주둔한 미 제5공군 통신대는 건물을 탐내 건물을 비워주지 않았다. 1954년 2월 23일 본교생들은 안암동 본교로 복귀할 때까지 중앙 중·고등학교의 교사를 사용했다. ‘고대신문’은 이에 12월 1일자에 건물을 돌려달라는 내용의 영문 호소문 ‘GIVE US OUR CAMPUS’를 게재했다.

기능의 변화
- 종합 기능에서 지금은 행정 기능만
본교의 유일한 건물이었던 준공 당시엔 수업기능을 포함한 종합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대 100년사>에 따르면, 1933년 인촌 김성수 선생은 550명의 학생을 수용할 것을 예상하고 △교장실 1곳 △사무실 2곳 △응접실 2곳 △회의실 1곳 △교실 15곳 △중강당 1곳 △화장실 6곳 등을 포함하도록 설계했다. 이석재(철학과 54학번) 교우는 “당시 캠퍼스에는 본관과 도서관 밖에 없어 본관에서 수업을 주로 들었다”며 “그 당시 강의실은 보통 고등학교 교실과 비슷해서 문도 지금의 강의실과 다르게 미닫이 문이었다”고 회상했다. 1961년 서관 준공 이후, 여러 단과대 건물들이 증축되면서 본관에서의 수업 수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택(문과대 철학과) 교수는 “1970년대 본관에서 주로 법대, 경영대 수업을 들었다”며 “본관에서 정확히 언제까지 수업업무를 담당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건물의 내부
신축 당시의 본관은 건축물의 웅장한 고딕양식으로도 유명했지만 호화로운 내부로도 유명했다.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의 회고록인 <양호기>에 따르면 본관 신축 당시(1934년) 교장실을 비롯해 주요 사무실의 바닥에는 모두 떡갈나무 모자이크가 깔려 있었으며, 교장실의 의자와 소파는 눈이 부신 황금색 실크 벨벳으로 씌워져 있었다. 이어 한 층에 2개 씩 모두 6개나 되는 수세식 화장실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장실의 내부 벽을 전부 고급 백색 타일로 발라놔, 한 발자국 화장실에 들어서면 눈앞이 환한데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5,6개의 거울과 세면기가 번쩍거렸다고 한다. 변춘애(사학과 72학번) 교우는 “본관이 천장이 높고 시원하게 잘 지어졌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시설이 잘 돼 있던 화장실의 백색타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사건 사고
- 4층 천장에서 시체가 발견돼
1972년 4월 3일, 본관 4층 149호 강의실 천장에서 허용(정외과 59학번) 씨의 시체가 실종 11년 만에 발견됐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오탁번(영어영문학과 64학번) 명예교수는 “1972년에 이 기사를 접하고, <굴뚝과 천장>이라는 단편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굴뚝에서 투신자살한 춘천의 성심여대(현 카톨릭대)생과 천장에서 발견된 본교생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굴뚝과 천장>은 4.19 혁명 전후의 대학가의 모습과 학생들 내부의 현실 비판과 취업을 위한 현실수용 사이의 분화과정을 잘 드러낸다.

- 이사장실 동양화 도난
1990년 7월 30일, 본관 2층 고려중앙학원 재단이사장실 안에 걸려있던 ‘대만의 피카소’ 장대천 화백의 청록 산수화(당시 시가 2억 원)가 도난당했다. 1983년 별세한 장 화백의 작품은 진품거래가 없어 작품 가격이 당시 호당 100만 원이 넘었다. 당일 발행된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경찰은 액자에서 그림만 예리한 칼로 오려 가져간 것을 미루어 동양화 전문털이범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본관 점거
본관은 고려대학교 건물 중 가장 처음에 지었던 건물이며 캠퍼스를 대표하는 건물이어서 주로 시위의 점거 건물로 이용됐다. 1980년대부터 본교생, 교수나 강사, 직원들이 학교 측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에 항의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본관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는 경우가 증가했다.

- 서창캠퍼스 1200명 본관 점거 농성
1989년 6월 8일 1200명의 서창캠퍼스(지금의 세종캠퍼스) 학생들이 안암과 서창캠퍼스의 유사‧중복학과 통폐합 요구 등이 포함된 지방캠퍼스 발전방안 실현과 부정입학 사건에 연루된 이준범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상경했다. 이들은 14일 동안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며 본관을 점거했다.

- 자연자원대 교수 30명 총장실 점거
1996년 10월 11일 생명과학부 신설과 관련해 자연자원대 교수 30명이 본관 총장실 점거농성을 했다. 사태는 학교 당국이 식품공학과와 유전공학과를 자연자원대에서 분리해 1997년부터 생명공학대학 내 생명과학부로 통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비롯됐다. 자연자원대 교수들은 총장에게 계획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하고 14일까지 총장실에서 농성했다. 1996년 10월 28일자 ‘고대신문’에 따르면 학교 당국은 측은 이에 대해 “역사상 초유의 교수들의 총장실 점거 농성”이라고 표현했지만, 교수 측은 “총장을 비롯해 각 처장이 만나주지 않아 생긴 일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사진│이지영 기자 ljy@·고대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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