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 소공동 한진빌딩 15층. 입구 한가득 붙어 있는 격려 메시지를 제외하면 한국일보 편집국은 여느 신문사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편집국에 있는 스무 명 남짓한 기자들은 취재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한편에선 기획회의도 한창이었다. 평온한 듯 분주한 편집국 풍경에서 25일 간의 폐쇄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지면엔 반영되지 못한다. 편집국을 점거하던 용역은 사라졌지만 사측의 실질적인 편집국 폐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일보는 사측 인사 10여 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편집국 폐쇄가 풀린 이후부턴 이들이 집에서 쓴 기사들이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에서 다듬어져 인쇄된다. 사진부 기자가 사진을 송고할 수 없고 편집부 기자가 조판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측에 의해 발행되는 한국일보는 여전히 ‘짝퉁’이다.

폐쇄 조치가 풀린 한국일보 편집국의 모습. 출입은 가능하지만 이곳에서의 노력은 지면에 반영되지 않는다. 전국에 배부되는 ‘한국일보’는 한국일보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에 마련된 별도의 편집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사진 | 송민지 기자 ssong@
편집국 폐쇄는 일단 풀려
  6월 15일 오후 6시 한국일보 편집국은 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쇄됐다. 사측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편집국 폐쇄를 감행했다. 노조 측 기자 180여 명의 편집국 출입을 막기 위해 외부 용역도 동원됐다. 편집국만 폐쇄한 것이 아니었다. 사측은 기사를 올리고 수정하는 집배신 프로그램도 막았다. 사측은 6월 17일부터 사측에 동조하는 10명으로 한국일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자란 지면은 통신사와 자매지의 기사로 ‘땜질’했다. 그러고도 평소의 36면을 채우지 못해 24면을 발행했다.
  사태는 4월 29일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지부가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장재구 회장이 2002년 한국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200억 원에 달하는 자신의 채무를 한국일보의 자산을 이용해 갚았기 때문이다.
  고발이 있은 직후인 5월 1일, 사측은 편집국 인사를 단행해 논란을 심화시켰다. 이에 노조는 5월 2일자 한국일보 1면에 ‘회장의 불법 인사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싣고 5월 3일부터 3일 간 ‘편집국장 보직해임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한국일보 편집규정강령’이 명시한 편집국 재적인원의 3분의 2를 넘었지만(투표율 86.5%, 인사 반대 98.8%) 사측은 인사를 유지했다. 최진주 한국일보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부위원장은 “사측이 자신들의 뜻에 따를 것 같은 사람을 승진시켜 회유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질시켰다”며 “명백한 보복성 인사에 동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80여 명의 기자들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신임 편집국장의 취재지시를 거부하면서 회사 측에 항의했다.
  8일 서울중앙지법은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측의 편집국 폐쇄를 해제해 달라며 회사를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적 요청에 반할 뿐 아니라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중대한 저해 요소’라며 편집국 출입을 방해하거나 기사 작성 및 송고 전산시스템 접속 차단을 ‘근로제공 거부’라 판결했다.

파행 제작은 여전히 지속
  한국일보 기자들은 “사측은 편집국 폐쇄를 중단했지만 파행 제작은 중단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취재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기존 데스크는 현재 공석이고 사측 데스크는 취재 지시를 내리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기사 송고 시스템은 이용할 수 있지만 편집과 관련한 프로그램 이용은 불가능하다. 기사 송고 후의 편집 과정이 전적으로 사측에 있어 기자가 쓴 기사는 언제든 사측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상황이다.
  연속된 파행 사태에 신문의 질은 낮아지고 있다. 정상적으로 발행됐어야 하는 7월 11일자 한국일보는 ‘연합뉴스’, ‘객원기자’, ‘외신종합’으로 도배된 조각보 신문이었다. 사측은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모자란 인력 보충을 위해 경력기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1면에 실었다. 비대위는 신문편집 과정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상원 비대위원장은 “회사가 임시방편으로 신문편집학원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해 신문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분수령
  사측의 파행이 오래 지속되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사측은 매일 3020만 원의 간접강제금을 노조에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대위는 장 회장 부임 후 한국일보의 경영 상태가 악화돼 사측이 간접강제금을 부담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태 반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장재구 회장 검찰 수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기자들 간의 단결력은 한층 강해졌다. 최진주 비대위 부위원장은 “편집기자와 취재기자의 거리감이 사측과의 대립 과정에서 많이 사라졌다”며 “정상화된 한국일보엔 기존보다 치열해진 고민을 담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최 부위원장은 “‘짝퉁 한국일보’ 때문에 한국일보의 위상과 신뢰가 너무 많이 추락해 편집국이 정상화됐을 때 신문을 제대로 만들지 않는다면 독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지면에 실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취재점검과 기획회의를 계속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언론의 사회적 책무 생각해야
  정상원 비대위원장은 “일반 기업의 논리로 언론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며 언론자유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평가했다. 한국언론학회,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 3개 단체는 7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표현의 자유 실현을 위해 공론장 역할을 해야 하는 언론사 편집국이 용역업체를 앞세운 폭력에 의해 강제로 봉쇄됐다’며 ‘이는 편집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일보가 지닌 중도지로서의 가치를 언급한다. 보수와 진보로 갈려 이념대립이 극심한 한국 언론계에서 한국일보는 거의 유일한 중도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민환(미디어학부) 명예교수는 “특정 이념을 지지하는 것도 언론의 자유지만 중도지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한국일보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민환 교수는 한국일보를 “저널리즘적으론 성공했지만 경영에 실패한 신문”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일보 사태가 발생한 근본 원인에는 장기간의 경영악화가 있다는 것이다. 창업주인 故 장기영 회장은 편집권 보장을 우선시했으나, 이후 취임한 회장들은 언론의 사회적 역할보다 수입 증대를 중시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됐다고 덧붙였다. 김승현(미디어학부) 교수는 현재의 한국일보 사태에 대해 “새로운 경영진이 누가 되던 간에 언론사의 사회적 책무를 고려해 운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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