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가만 한국전쟁을 그린 것은 아니다. 2차 대전을 겪은 서구 미술계에 한국전쟁은 또 하나의 소재였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는 피카소의 말처럼 서구 미술가들은 각자의 시각에서 반전(反戰) 메시지, 파병된 자국 군인들에 대한 사기 진작 등 다양한 목적으로 한국전쟁과 관련된 전쟁 회화를 그려냈다.

 

이념논쟁에 묻힌 반전 메시지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게르니카>를 통해 반전화가로 명성을 얻은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신천 학살사건을 소재로 무방비 상태의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로봇으로 묘사된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발표되자마자 격렬한 이념논쟁에 휘말렸다. 당시 신천학살사건의 가해자를 미군으로 추정하던 상황이었기에 피카소는 미국을 한국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 지목한 모양새가 됐다. 피카소가 1944년부터 프랑스 공산당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논란을 가중시켰다. 미국은 피카소를 프랑스 공산당 입장을 선전하는 나팔수로 간주해 격렬히 비판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발표된 <피카소: 적색시대>라는 삽화에서 피카소는 공산주의의 상징인 ‘낫과 망치’가 그려진 스케치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공산권마저도 <한국에서의 학살>을 외면했다. 미군에게 용감하게 저항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원한 프랑스 공산당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시민의 모습이 그려진 <한국에서의 학살>은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로봇처럼 묘사된 가해자와 벌거벗은 여인, 아이들로만 구성된 피해자의 모습도 문제가 됐다. 미국을 향한 확실한 비난 메시지를 원한 소련에게 추상적으로 그려져 희생자와 가해자가 어느 국가의 사람인지 불분명한 <한국에서의 학살>은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그림으로 간주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의 실패 이후 고민하던 피카소는 새로운 반전 작품을 구상해냈다. 1952년 발표된 <전쟁>과 <평화>는 논란이 됐던 양분구도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의 오른편에 그려진 벌레는 세균전이라는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세균전을 펼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전쟁>을 그리며 제작과정을 차례로 공개했는데 드로잉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벌레가 완성작에 추가된 것이다. 평론가들은 ‘공산주의자’ 피카소가 또 다시 미국을 겨냥한 그림을 그렸다는 해석을 제기했지만 피카소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인자했던’ 마오와 스탈린: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리베라 <전쟁의 악몽과 평화에의 꿈>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자 벽화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도 한국전쟁에 관한 그림(<전쟁의 악몽과 평화에의 꿈(Nightmare of War, Dream of Peace)>)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 역시 이념논쟁에 휘말렸다. <전쟁의 악몽과 평화에의 꿈>에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미국과 협약을 맺는 모습과 피난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등 전쟁 피해자들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과 민간인들의 모습을 대비해 그들이 받는 고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리베라는 자신의 작품과 한국전쟁의 연관성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작품 속 정황과 그림이 그려진 시기(1952년), 한복을 연상시키는 옷을 입은 피해자들 때문에 한국전쟁을 그린 그림이라 추측되고 있다.
  처음 멕시코 정부는 국제박람회에 내보낼 대표작을 리베라에게 의뢰했다. 이에 리베라는 ‘평화에게 헌정될(Dedicated to peace)’ 작품을 그리겠다며 <전쟁의 악몽과 평화에의 꿈>을 멕시코 정부에 기증했다. 하지만 작품은 국제박람회에 전시되지 못했다. 작품에 그려진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습이 너무 인자하게(benevolent) 그려졌기 때문이다. 국경을 맞댄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정부는 전시 예정된 그림을 갑작스럽게 철거했다. 작품을 되돌려 받은 리베라가 마오쩌둥에게 그림을 헌정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전쟁의 악몽과 평화에의 꿈>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포화 속에서 전쟁을 그려내다: 이보르 헬레(Ivor Hele)

  한국전쟁은 종군화가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전쟁에 자국 군인들을 파견한 국가들은 종군작가, 종군기자 등과 함께 종군화가들을 한반도로 파견했다.
  호주의 이보르 헬레는 1940년 군에 입단해 한국에서 5달 가량 호주정부 공식 종군화가로 활약했던 화가다. 헬레는 한국전쟁에 파병된 호주 군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들이 겪은 전투, 승리, 아픔 등을 표현했다.
  <가평>은 헬레 종군회화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묘사로 가평의 풍경을 정확하게 재현해 기념회화적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공군에게 밀리던 전쟁의 양상을 바꾼 가평전투는 호주 육군의 최대 승리 전투로 기록돼 있다.
  헬레는 주로 군인들과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 참호에서 생활하던 군인들의 모습은 헬레에게 주요 소재였다. 헬레의 대표작인 <210 고지, 참호 속>은 중공군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접어든 시기를 그린 것으로 제임스타운 라인에서 호주군 보병이 210 고지의 참호 속에 앉아있는 모습을 담아냈다. 이 작품은 직접 체험한 전쟁의 참혹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 알렉스 칼레티(Alex Carletti)는 헬레에 대해 “전쟁에 관한 어떠한 기록물도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용기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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