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범대교수·
역사교육과
필자는 중국사 관련 교양강좌를 개설하고 있지만 강의시간 중에는 곧잘 학창 생활 중에 반드시 서양철학사를 한 번 읽고 졸업하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인간은 서양철학사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면서 이를 읽을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이렇듯 서양철학사를 먼저 읽기를 권하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나름의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볼 때 꼭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더욱이 내 자신이 대학생 시절 어느 방학 때 한 보름 시간을 내서 읽었던 <서양철학사>가 훗날 학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도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일부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 우리는 서양적 전통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으면서 살고 있다. 정치면에서는 자유주의의 기조 아래 의회민주정치의 체제 속에 살고 있다. 이 체제는 오직 서양의 전통 속에서 배태되고 성숙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밖의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도 서양의 근대에 발전된 것이다. 서양 밖의 다른 세계에도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전해서 사회경제의 틀로 정착된 것은 서양 근대에만 가능했다.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서는 그 맹아적인 요소들이 발아해서 사회 전체를 가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과학적 지식과 그 산물들도 대개 서양적 전통에서 나온 것들이다. 동양에도 과학과 유사한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발전했다면 분명 근대적인 과학으로 도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진보를 위한 발걸음은 유사과학이 실험과학으로 도약하기 바로 직전에 멈춰 섰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는 도약을 향한 발걸음을 추동할 에너지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질서는 서양법적 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동양법과 우리나라 법은 사라졌다. 중국에도 일찍부터 조숙한 법문화가 있었지만, 서양법이 도입되자 전통법은 외마디 소리 한마디 내지도 못하고 역사의 피안으로 사라졌다. 최근 백여 년 전까지 이천 수백 년 동안 우리 모두를 지배해왔던 전통법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원인은 무엇인가? 그 법에는 인민은 없고 군주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민의 시대에 군주의 법이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작금의 지식계와 독서계의 동향을 돌아보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와 우리 것을 재발견해서 자아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매우 활발한 것 같다. 이런 추세는 결코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당연한 시대적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요구와 추세가 단순히 서양적인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직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극복은 과거 역사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8,19,20세기의 세계사는 서구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결과론적이기도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가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없었던 원인을 밝혀 감계로 삼자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결과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뭔가 있었고 그래서 우리 역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논리를 펴는 것은 온당하지도 않고 성공하기도 어렵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기보다 미래를 지향하면서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다. 보다 훌륭한 미래를 열기 위해서라도 현대 문명의 토대인 서양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철학사>를 읽기를 권하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