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본교 문과대학 B110호에서 한국사연구소 박한용 연구교수(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가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의 일기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본군 위안소의 구체적인 실상이 담긴 이 일기는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로 일한 조선인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버마, 싱가포르에서 기록한 것으로, 일본군의 위안부 개입을 입증할 자료로 주목 받았다. 최근 일본이 우경화가 심화 되면서 위안부 관련 망언과 억지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국 측의 객관적 입증자료가 될 일기를 한국사연구소 박한용 교수의 자문, 부산에서 버마로 끌려간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안병직 번역‧해제, 이숲)를 토대로 분석해봤다.
미얀마 부근의 위안부
  일기의 의의
  공개된 일기는 식민지 일본군 위안소의 실상을 담고 있어 일본군의 위안소 개입을 입증할 국외 증거자료에 구체성을 더하고,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뒷받침 할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관련 증거자료의 유형은 크게 △일본 국가기구와 군 계통의 공문 서류 △연합군 측의 포로 심문조서와 재판자료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등으로 나뉜다. 일본 측 자료는 공개가 제한적이고, 포로 심문조서는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여 일본에서 공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위안소 관리자가 위안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일기는 일본의 문서와 할머니들의 증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직접 증거자료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나는 다른 조(組) 여자들을 만나면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여자들은 식당에 돈 벌러 간다고 대답을 하였는데, 그들은 미구에 닥칠 그들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일본은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인정한다. 일본 측은 군이 있던 현지에서의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은 있었지만, 위안부가 조선에서 해외로 갈 때의 강제성을 보여주는 사료는 없다고 주장한다.
박한용 교수는 “일본이 부정하는 강제성의 유형인 납치, 폭행 등에 주목하기 보단 일본이 공권력을 이용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모집에 국가가 직접 나서 취업을 시켜주겠다며 회유하고, 사기 혹은 기만을 벌였다면 그것이 강제성이며 반인륜적 범죄라는 것이다.

  위안소 경영에서의 군의 개입
  1943년 1월 12일 화요일. 맑음
“의무실에 갔다가 연대본부 사무실에 가서 위안부 수입보고서를 제출하고 랑군으로 가는 교통편이 있으면 출장증명서를 발급해달라고 부탁하였다.”

  1943년 7월 26일 월요일. 흐리고 비
  “인센의 위안소 2개소가 병참관리로 넘어간 뒤 위안부 검징도 병참의 군의가 하기로 되어 매 일요일마다 킨센관(金線)에서 수검케 되었다. 인센에서 야마곤의 킨센관까지 가서 검사 맡기는 여간 곤란이 아니다.”
위안소 관리자는 매일 오전 병참사령부에 영업일지를 제출했으며, 일정 거리 이상의 외출을 할 때는 군의 허가를 받았다. 또한 위안부의 검징은 군이 지정하는 곳에서 받아야 했다. 이는 위안소 관리자가 군에 종속돼 있었고, 군이 위안소 경영에 상당부분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1943년 3월 10일 수요일. 맑음
“55사단으로부터 만다레이와 가까운 이에우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金川씨의 위안소에 떨어졌다. 위안부 일동은 절대 반대한다고 한다.”

  1943년 3월 14일 일요일. 맑음
“金川씨는 사령부 명령에 견디지 못하고 이에우로 옮기게 되었다.“
군이 강제로 위안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위안부는 이를 거부했음에도 결국 옮기게 됐다. 위안부와 위안소 관리인의 거주이전이 군에 의해 제지 당했는데 이는 군이 위안소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1943년 12월 3일 금요일. 맑음
  “지난 7월 초에 랑군에서 위안소를 경영하는 카네다(金田) 씨는 위안부를 모집하러 조선에 나갔다가, 이번에 위안부 25명을 데리고 버마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도착 하였다”
  중국 측 기록(<漢口慰安所>, 223p)과 1946년 바타비아 판결문을 미뤄볼 때, 이 구절에서 나오는 카네다(金田)는 공식 군속 관계자는 아니지만 군속 취급을 받았다. 카네다(金田)와 같이 현지에서 군속 처우를 받는 사람의 위안부 모집은 일본군의 위안부 공급 순환의 일환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위안부 모집을 시행한 민간업자 대부분은 조선군 사령관이나 조선 총독부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전선의 변경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중인 위안부
  위안부의 조직적 동원
  1944년 4월 6일 수요일. 맑음
  “생선조합에 가니 재작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 4차 위안단의 단장으로 온 츠므라 씨가 생선조합에 요원으로 있더라”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우리 18명은 1942년 7월 10일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배는 군용으로 예닐곱 척이 함께 떴는데 우리가 탄 배는 맨 마지막에 위치했다. 내 기억으로는 나와 같은 여자들이 3, 4백여 명도 넘게 배 안에 가득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일행 18명을 한 조가 되어 같이 생활했는데 이런 조들이 수많이 있었다. 우리가 탄 배는 한 두어 달 항해했다. (중략) 우리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의 랑군에 도착하였다.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과 일기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할머니가 동원될 때의 위안부는 ‘4차 위안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이들을 ‘4차 위안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루어 볼 때 1,2,3차 위안단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으며, 차수를 붙였다는 것은 개인이 임의로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일본 측의 반응
  일기는 오채현 타임캡슐박물관 관장이 고서점에서 발견해 소장해 오다 2012년 9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전해졌다. 이후 조선일보와의 공동 연구과정을 거쳤으며,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과 일본 연구자인 기무라 칸(木村幹), 호리 타츠오(堀和生)도 공동으로 일기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마이니치는 동일한 일기 내용을 두고 서로 다른 논조로 8월 7일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일기 내 일본군의 개입과 조직적 동원 부분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구성했다. 반면 마이니치는 위의 사실을 조금씩 언급 하면서도 기사 후미에 일기의 핵심에서 벗어난 부분을 따로 강조해 기사의 논조를 흐렸다. 마이니치는 위안소 관리자의 일기 내용을 앞 뒤 맥락 없이 “오늘은 병원에 가서 병치료를 받았다”, “오늘은 극장에 보러 갔다”등의 일상적인 얘기를 덧붙여 기사에 실었다. 일상의 얘기를 모아놓는 기사의 구조를 취해, 위안소 관리인의 업무가 군의 개입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마이니치는 위안소 관리인의 일상 얘기 뒤에 일본 내각 2차 보고를 연결시켰다. 2007년 일본이 발표한 2차 내각 보고는 현지에서 군의 강제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는 논조의 발표였다. 마이니치는 내각 보고를 연결시켜, 일본군과 위안소 관리인은 관련이 없다는 왜곡된 시각을 재생산하고 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