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全勝)학번. 교내 스포츠 기자들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든 ‘정기 고연전(정기전)’ 경기를 승리로 이끈 운동부 기수를 ‘전승학번’이라 일컫는다. 전승학번은 고연전이 시작된 1965년 이래 축구부 중에서는 89, 90, 91, 09학번만 가진 명예로운 타이틀이다. 특히 고려대 축구부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기록한 정기전 6연승은 양교 축구부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황금의 시기’다. 황금의 시기 마지막 전승학번인 부천 FC 곽경근(경영학과 91학번) 감독이 후배들의 정기전을 맞아 그날을 회상했다.

  곽경근 감독에게 대학 시절 최고의 순간은 그가 주장으로 활동했던 1994년 정기전이다. 축구부 3년간 수비수로 활약하다 마지막 고연전에는 센터포워드로 투입됐다. 당시 고려대는 야구부터 럭비까지 연세대에 4패를 당한 상황이었다. 5개 운동부 연합주장으로서 곽 감독이 느끼는 책임감은 막중했다. 경기에 임하기 전 ‘1무 4패’는 있어도 ‘5패’는 없다고 되뇌었다. 곽 감독의 다짐처럼 ‘5패’는 없었다. 전반전 측면에서 들어온 패스를 가슴으로 트래핑한 곽 감독이 바로 첫 득점을 올렸고 마지막 골도 어시스트하며 3 대 1 완벽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때는 즐거움보다 안도감이 컸지. 고연전은 전쟁이야. 1년 동안 괴로운 마음도 컸어.”

  4년째 고려대 축구부를 이끌고 있는 서동원(체육교육과 92학번) 감독은 곽 감독과 이 시기를 함께한 후배다. 주장이었던 곽 감독은 같은 잘못을 해도 일부러 연장자를 혼냈다. 1년 후배인 서 감독이 곽 감독에게 많이 혼난 것도 이 때문이다. “송추 합숙 때 선수들이 열심히 안 하기에 동원이를 불러서 혼을 많이 냈지. 동원이가 욱해서 ‘나 안 해!’ 하고 나가기에 붙잡지 않고 보냈어. 다음날 삭발하고 돌아와 묵묵히 훈련받더군.”

  곽경근 감독은 축구에서만큼은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17세엔 17세 국가대표팀, 19세엔 19세 국가대표팀·올림픽 대표팀, 22세엔 월드컵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정기전에서도 ‘전승’을 했다. 17세에 그는 프로팀에서 ‘1억’에 입단 스카우트를 받기도 했지만 고려대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려대 선수생활은 아직도 그에게 자랑스러운 시절이다. 특히 5개 운동부 연합 주장을 맡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5개 운동부 연합 주장은 내가 최초일거야. 그때는 그 자리가 어떤 의미인 줄 모르고 시키니까 하나보다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큰 영광이지.”

  곽 감독은 후배에게 부상만큼은 기민하게 대처할 것을 당부한다. 곽 감독 또한 선수 시절 크고 작은 부상을 겪었다. 전성기에는 치료실 출퇴근을 반복했다. 발목이 걸을 때마다 빠지는 데도 핵심 선수라는 이유로 수술을 미뤘다. 독한 진통제와 링거로 약에 취해 비틀거린 적도 많았다. 결국 부상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큰 부상보다 조금씩 축척되는 작은 부상이 문제야.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날 경기 쉬고 회복해야 해. 한 경기 욕심내다 남은 경기 못 뛰어.”

  후배들에게 애정이 깊은 만큼 아쉬운 점도 많다. 특히 ‘악과 깡’이 퇴색됐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선수 시절 곽 감독은 실려 나가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몸을 ‘불살랐다’고 말한다. 곽 감독은 그런 근성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학 선수 중에는 신체 조건은 좋은데 근성 없는 선수들이 참 많아서 안타까워. 독하게 맘먹지 않으면 결국 선수로서 성장에 한계가 올 거야.”

  곽 감독은 특히 정기전을 앞두고 후배들이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하던 1학년도 경기장에 들어서면 다리가 풀릴 거야. 경험이 있는 고학년 위주로 경기를 풀어가야해. 또 나 혼자 잘하려고 하지 말고 팀플레이에 매진해야 해. 거뜬히 이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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