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소슬해지고, 온 몸이 미열로 덮히는 날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그리고 손이 가는
책이 있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문학과 지성사刊,1991년)이다.
지난 90년대 초반 나의 대학생활이 2막 정도를 마치고 청춘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때쯤 정경대 후문에
있는 동방서적에서 우연히 이 책을 구했다. ‘롤랑 바르트’의 명성을 제대로 알기 전에 접했던 책에서 저자의 집요한 독서이력과 감정을 이성으로
표현하는 논리와 산문을 운문으로 이끌어내는 글쓰기에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저자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플라톤의 <잔치>외에 여러 책들을 텍스트로
삼아 가물거리고 아스라하기만 한 사랑을 깊은 사유로 채를 걸러 명징하게 얘기하고 있다. 멀리서서 무정하게 말하는 뜨겁고 처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만든다.
책을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살을 시퍼런 칼로 한 점씩 져며내 얼음 도마위에 올려놓는 느낌 때문에
저절로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맘때쯤 내게도 이 책 서문에 나오는 것처럼 괴물을 낳는 우연의 힘에 끌려 ‘사랑’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그를 처음 만난 지 2주만에 난 군대에 갔지만,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 ‘사랑’을
키워갔다. 그리고, 그 괴물이 한 단계씩 커질 때마다 이 책을 뒤적이며 견주어 보곤 했다. “그때 하늘은 얼마나 푸르렀던가”
아직도 나의 고향집 다락방 한쪽 종이상자안에 그가 보낸
232통의 편지가 파일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 파일을 열어본 지가 벌써 천년이 지났다.
감추어 두었기에
지금처럼 바람이 소슬해지고, 온 몸이 미열로 덮히는 날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그리고 손이 가는 책이
있다.
<인터넷 독자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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