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보슬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공사 재개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설치한 가로 5m, 세로 15m의 비닐천막 위엔 계속해서 물이 고였다. 각 언론사가 경쟁적으로 높이 치켜든 카메라가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는 비닐을 의도치 않게 지탱했다. “비가 많이 오는 데가 아인데 우째 계속 비가 오노” 비닐천막 아래 앉아 줄담배를 태우던 김말숙(여‧80)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새벽 6시, 바드리마을로 가는 길
  한국전력공사(한전)가 ‘밀양 765kV 송전탑 공사’를 재개한 2일, 단장면 바드리마을을 찾았다. 89번 송전탑 공사현장이 위치한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바드리마을은 인구 11만의 소도시 밀양에서도 3대 오지 마을에 속한다. 시내에 위치한 밀양역에서 바드리마을까지는 택시로 50분이 넘게 소요됐다. 1시간 간격인 농어촌버스로는 2시간이 걸린다.
  바드리마을로 향하는 길은 기이했다. ‘단장면’이라는 초록색 표지판과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경남주유소 근처에 늘어선 경찰버스 3대였다. 10분 후 단장면사무소 앞에도 3대가 더 보였다. 그 이후에도 경찰버스는 서너 대씩 계속 발견됐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찾아보기 힘든 새벽의 시골 길에서 15대의 경찰버스를 지나치고 나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장면에 들어선 후 구불구불한 산길을 20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바드리마을 4km’가 새겨진 마을 표지석이 나왔다. 하지만 1km 채 가지 않아 차를 세워야 했다. 표지석을 지나 커브 길을 돌자마자 경찰 200여 명이 폭 10m의 도로를 가득 차지하고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7시 30분, 주민과 경찰의 대치
 

"내 죽이고 공사해라"는 말에도 경찰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앉아있는 경찰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가자 반대 주민 20여 명이 때 묻은 장판을 깔고 비닐천막 아래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 온 인권침해감시관 2명도 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전날 밤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했다. 반대 주민들 뒤로는 형광 우비를 입은 경찰들이 송전탑 공사현장으로 가는 길목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7시 20분, 반대 주민들의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빵과 요구르트, 물 등으로 간단한 식사를 하던 주민들은 취재진에게도 음식을 건넸다. “마흔여섯에 남편 죽고 내 혼자 이때꺼정 남아가 지킨 땅이다. 송전탑 지을라거든 고마 내 직이삐고 지어라” 왜 반대하냐는 질문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이남이(여‧66) 할머니도 기자에게 요구르트 하나를 줬다. “서울에서 온 학생이라 캤제. 아나, 니도 이거 하나 묵으라”
  평화로운 시간은 10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7시 27분, 식사시간을 틈타 경찰이 병력을 교대하고 반대 주민들을 끌어내려 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주민들은 곧바로 깔고 있던 장판을 걷어내고 경찰의 방패를 잡고 미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몇몇 여경은 주민들에게 밀려 길옆으로 떨어질 뻔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카더라!”, “너거는 부모도 없고 할매도 없나? 이기 뭐하는 짓이고!” 분노에 찬 주민들 목소리와 취재진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조용하던 산마을을 순식간에 메웠다. 8시 무렵, 충돌 과정에서 실신한 김필귀(여‧77) 할머니가 밀양병원으로 이송되면서 대치는 수그러들었다.

10시 30분, “언론도 우리를 기만하더라”
 

병력을 교대하고 주민들을 끌어내려는 경찰과 반대 주민들의 대치는 30분 가량 지속됐다.

  8년간 계속된 밀양 송전탑 사태로 반대 주민들은 모든 것을 불신했다. 언론은 물론 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1일 새벽 한전 직원을 공사현장까지 태워다 준 김철민(가명, 남‧55) 씨가 주민들에 의해 10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붙잡히기도 했다. 전세버스 회사의 직원인 김씨는 한전 직원을 바드리마을 공사현장까지 태워줬다가 경찰과 반대 주민이 대치하면서 마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전 직원인 거 알면서 와 태워줬노? 니도 한전이랑 한통속이제?” 김씨는 회사에서 시킨 대로 일한 자신을 못 가게 막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다. “손님이 한전 직원인 건 알았지만 나는 사장 오더대로 일했을 뿐인데 나를 잡아두면 어떡합니까? 집 사려면 대출받아야 되는데 그게 오늘까지라고요!” 김씨는 대출 관련 증명서를 보여주고서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취재진 대부분이 떠나간 오후 1시, SBS 취재진이 마을에 찾아왔다. 취재진은 공사현장에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0분 만에 돌아갔다. 마을 주민들은 취재진이 돌아간 후 언론에 대한 불신을 쏟아냈다. “우리한테 유리한 건 한 개도 안 나온다. 세뇌 받은 거 맹키로, 즈그가 보여주고 싶은 대로 하더라. 초등학교 알라 취급하는 거 같아서 싫다” 강금례(가명, 여‧86) 할머니는 한전과 언론이 한마음으로 반대 주민들을 기만하는 것 같다고 했다.

13시 40분, ‘진짜’ 바드리마을의 이야기
  마을 입구에 모인 반대 주민 20여 명은 대부분 바드리마을이 아닌 근처 동화마을과 태룡마을에 산다. 정작 바드리마을 주민들은 찬성도 반대도 아닌 입장이다. 밤이나 대추 등 농업에 종사하는 반대 주민과 달리 바드리마을은 ‘팜스테이체험마을’로 지정돼 농업이 주요 수입원이 아니다. 송전탑 건설이 생업에 미친 악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중립을 지켜온 바드리마을 주민대표 8명도 이날은 경찰에 항의방문을 했다. 애초에 마을 주민과 합의한 조건을 지키지 않고 공사를 무리하게 강행했다는 이유에서다. 주민들은 1일에도 경찰에 항의했으나 경찰 측의 답변이 없어 마을 입구까지 내려왔다고 밝혔다. 정성복(남‧58) 씨는 “협상할 때는 집집마다 950만 원까지 보상해준다더니 실제 협상을 할 땐 마을 전체에 6000만 원 보상으로 끝내려 했다”고 말했다. 총 28가구가 입주해 있는 바드리마을 한 가구당에 결국 214만 원에 불과한 보상 금액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바드리마을 주민은 또 다른 협상 조건인 도로 확장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씨는 “하도 합의해 달라고 해서 도로를 2차선으로 확장해주면 공사해도 된다 말했더니 알겠다고 하고는 공사부터 한다”고 말했다.
  경찰이 마을 입구를 가로막아 정작 마을 주민의 기본적인 생활까지 힘들다는 성토도 이어졌다. 바드리마을 반장 장창명(남‧46) 씨는 “마을의 어린 학생들이 먼 산길을 돌아 학교에 가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통행의 자유를 요구했다.
  농성하던 반대 주민들은 주민대표와 경찰의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러게 왜 반대하지 않고 협상을 했나”, “우리와 같이 반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5시, 농성 주민을 지지하는 시민들
 

오전 8시, 김필귀 할머니가 대치 도중 실신하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오후 들어 반대 주민과 경찰 사이의 긴장감은 덜해졌다. 줄곧 무표정하던 경찰 몇몇은 현장 주위를 돌아다니는 강아지를 보고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마을을 휘감았던 긴장이 잠시 풀리면서 반대 주민 일부는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에선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역색을 반영하듯 주민 대부분은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고 했다.
  “지는 안 늙을 줄 아는가배. 할매들은 산골에서 노숙하게 하고 편한 데 앉아가 좋은갑지”, “송전탑 짓지 말라고 말 한 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그게 그래 어렵나”, “연금도 준다캤다가 도로 물러뿌고… 괜히 뽑았다!”
일부 언론에선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진보 세력의 선동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단장면 단장리 공사현장에선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민주당 당원이 반대 주민과 함께 농성에 참여했다. 새벽에 바드리마을을 방문한 민주당 문영선 의원도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반대 주민 편에 섰다.
  하지만 실제로 이날 농성 현장을 찾은 외지인은 정치 이념과 관계없는 일반인이 다수였다. 30~40분 머물다 가는 정치인과 달리 일반 시민들은 반나절 넘게 현장에 머물며 반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예수성심시녀회’, ‘어린이책시민연대’처럼 종교단체와 시민단체가 현장을 방문한 경우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방문한 사람도 10명이 넘었다. 울산광역시와 경계를 접한 단장면의 지리적 특성상 울산광역시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 혼자 단장면을 방문한 나은희(가명, 여‧43) 씨는 “페이스북에서 밀양 소식을 접하고 찾아올 결심을 했다”고 했다. 이들은 현장을 찾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주민들의 감사에 손사래를 쳤다.
  농성 현장을 찾는 일반 시민들은 반대 주민들에겐 큰 힘이 된다.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반대 주민을 위해 밥과 김치는 물론 감자전을 직접 부쳐 온 사람도 있었다. 현장이 인가와 떨어져 있고 다수의 주민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라 현장을 찾은 시민들은 자가용으로 주민들을 태워주기도 했다. “내가 아침에 나올 때 혈압약을 안 챙겨가꼬 집에 다시 드갔어야 됐는데 이 사람들 아니었으면 꼬박 오후를 다 날릴 뻔 했다이가” 김말숙 할머니의 말이다.

18시, 밤이 찾아온 산동네
  오후 5시부턴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대 주민들은 낮보다 가깝게 붙어 앉아 여분의 비닐을 덮으며 추위를 견뎠다. 이남이 할머니는 얇은 일바지 위에 두꺼운 누비바지를 겹쳐 입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엔 어둠도 일찍 찾아왔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은 “할머니들,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더. 건강부터 챙기이소!”란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주위가 제법 어둑해진 6시경, 반대 주민은 밤샘근무를 위해 침낭을 챙겨 올라가려던 경찰과 또 한 번 대치했다. 일부 경찰이 채증카메라를 사용하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금 어디서 카메라 들이대시는 거에요?”, “찍지 마세요!”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경찰은 침낭을 들고 올라가지 못했다.
  어둑해진 산길을 따라 마을을 떠난 것은 오후 7시였다. 마을에서 밀양역까지 가는 시골 밤길엔 여전히 인적이 드물었다. “앞에 가는 트럭 되게 느리네요” 기자를 밀양역까지 태워준 울산시민연대 소속 김이나(가명, 여‧30) 씨가 말했다. 밀양에서 14년간 거주한 기자는 “원래 밀양 자동차들 느리게 가는 편이에요.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모는 트럭은 더 심하고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느긋한 사람들이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요” 이나 씨의 대답이 바드리마을에 남아 있는 반대 주민들의 심정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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