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족주의’다. 중세 게르만 신화를 주요 소재로 삼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나치가 애지중지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혹자는 장희권(계명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자문을 통해 바그너 오페라의 민족주의에 대해 알아봤다.

바그너 음악은 최면 효과를 주는 집단 코러스가 많이 등장해 나치가 추구하던 선동 예술에 적합했다. - 오페라 <로엔그린> 中

 

바그너 음악은 최면 효과를 주는 집단 코러스가 많이 등장해 나치가 추구하던 선동 예술에 적합했다. - 오페라 <파르지팔> 中

19세기 독일 민족주의
  바그너가 활약하던 1840~80년대 유럽은 민족주의적 사상에 젖어 있었다. 쇼비니즘(Chauvinism), 징고이즘(Jingoism) 등 민족주의 부산물이 난무하던 시대 피히테(Fichte), 실러(Schiller) 등 독일 지성인들도 대부분 민족주의적 성향을 작게나마 지니고 있었다. 바그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의 독일통일(1871년) 전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대내적으로는 사회불안, 대외적으로는 통일 국가의 부재로 인한 국력 저하에 시달렸다. 이에 재산을 모아둔 독일의 중산층은 사회 안정을 절대적으로 열망했다. 장 교수는 바그너가 이 같은 독일 중산층의 열망을 예술로 대변했다 말한다. 그는 “지식인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혼란스런 사회를 결집시키고 싶어 했고 바그너 역시 자신이 제일 자신있는 예술을 통해 사회 발전을 이끌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중세 게르만 신화의 영웅을 자신의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영웅 지그프리트(Siegfried)나 <로엔그린>에 나타나는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Lohengrin) 등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속에 용감무쌍한 게르만의 전사를 집어넣었다. 또한 지그프리트를 독일의 민족영웅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에 비유하는 등 독일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통해 신화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에서 ‘위대한 독일정신’을 뽑아내고자 했고, 이를 ‘건방진 프랑스주의’와 대비시켜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에게 눌려온 독일 국민들을 격려하고자 했다.
  바그너를 위시로 한 ‘독일 정신’의 고취는 독일 통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게르만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던 당시 프로이센 사회를 자극했고 민족주의자들은 바이로이트 축제(독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오로지 바그너 오페라만을 공연하는 축제)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힘을 합쳐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장 교수는 “당시 모금 운동 후원자들은 바그너에게 투자하는 것은 곧 독일 통일에 투자하는 것이라 홍보했다”고 말했다. 일반 민중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모금했고, 바그너의 오페라는 점차 독일 통일과 민족주의의 상징이 돼갔다.

히틀러와의 ‘잘못된 만남’
  1883년 바그너 사망 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소멸되면서,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다. 바그너의 유족은 바이로이트 축제를 재개하려 했으나, 1차 대전 등의 혼란과 모금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바그너 민족주의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히틀러였다. 독일 국민을 선동하기 위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이 지닌 민족주의와 선전 도구로써의 기능을 주목했다. ‘위대한 독일 정신’을 강조한 바그너 오페라는 ‘위대한 아리아 민족’을 주창하던 나치의 이상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장 교수는 바그너 음악이 나치 프로파간다 강화에 최고의 도구였다고 말한다. “놀라울 정도로 바그너 음악의 특징과 히틀러가 추구하던 음악적 선동의 세계는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나치는 바그너를 통해 자신들의 프로파간다를 실현시켰고 바그너 오페라 역시 나치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연됐습니다.”바그너 음악의 집단극적 형태와 반유대주의는 히틀러를 매료시킨 결정적 요소다. 바그너 음악에는 한 작품에 200~300여 명이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집단 코러스가 많이 등장한다. 집단 코러스가 만들어 내는 열기와 최면 효과, 음악이 끝난 뒤 움트는 일체감 등은 나치가 추구하던 선동 예술에 적합한 형태였다. 히틀러와 나치는 바그너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시연해 대중에게 ‘위대한 게르만’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반유대주의에 대한 자극이 이뤄졌다. 장 교수는 히틀러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흉내 냈다고 말한다. “1850년에 쓰인 바그너의 일기를 보면 유대인을 벌레(Insekten)로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틀러는 표현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의 연설에 이 구절을 그대로 이용합니다.” 히틀러는 집단극을 통한 ‘위대한 게르만’ 사상과 반유대주의를 사람들에게 주입하고자 했다.

예술로의 복귀
  히틀러는 바그너를 진심으로 존경했기에 바그너의 가족과 접촉하는 등 자신과 바그너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바그너의 작품이 나치 선전도구로 이용된 건 아니었다. 히틀러는 <니벨룽의 반지>, <로엔그린> 등 게르만의 영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주로 권장했다. 특히 <로엔그린>의 경우 주인공 ‘로엔그린’에 히틀러의 이미지를 조금씩 동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선전 도구로써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은 외면당했다. 인간의 고뇌를 다룬 <파르지팔>은 1939년부터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철저히 ‘선전 도구’의 틀 안에서 이용됐다.
  바그너의 음악이 선전 도구가 아닌 예술로 복귀한 건 나치 패망 이후였다. 장 교수는 바그너의 음악이 낳은 비극에 “역사가 낳은 현상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오늘날 바그너의 음악과 바이로이트 축제는 정치색이 완전히 씻긴 채 상영된다. 현재 바그너의 음악은 아이러니하게도 바그너의 의도도, 히틀러의 의도도 아닌 순수한 예술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장 교수는 “2차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바그네리안을 국수주의자로 동일시하는 시선이 있었으나, 독일 내에서 나치즘을 많이 씻어냈기 때문에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바그너의 음악을 민족주의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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