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 >                                                      

문보영(사범대 교육11)

1.
안개가 없는 마을에 정거장 같은 안개가 끼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안개를 그리워했다
안개를 낡은 속옷처럼 받쳐입으며 나는 수치심을 덜었다
그래서 나는 한 꺼풀의 안개에 대해 기록한다

2.
소년들은 창가에서 속손톱빛 안개를 내다보았다. 창문을 아무리 문질러도 안개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3.
멀리 있는 것들을 미리 보여주지 않아 안심이 돼. 사람들이 떨구고 간 손금들을 쓸어담으며 청소부는 말했다. 그 속에서 코끼리가 섬같이 나타나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아. 애당초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수상함에 익숙해질밖에. 청소부는 말했다.

4.
무릎뼈를 동그랗게 오므린 채 텅 빈 욕조 속에 담겨 있어.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안개 속에서 익사해도 아무도 애도하지 않아서 세상은 고요히 흘러가는 법.

5.
자자, 나를 봐, 안개를 훔치고 싶다면, 쉬……. 조용히 해…….이렇게 안개를 착착 개켜서 여기에 담으면 된다고…….쉬……. 마늘 머리처럼 푸석해진 노파가 오래된 장롱의 문고리를 매만지며 말한다. 그녀는 안개의 끝자락을 아주 조금, 잘라낸다. 그녀는 미쳤지만 미치지 않았다. 그저 안개에 약간의 과거를 떠넘기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6.
안개 속에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덧대어진다. 아무리 잠을 자도 누구도 자신의 꿈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코끼리와 피에로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도 여유롭고 느긋하므로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저 졸린 눈을 하고 있을 뿐 지나가는 사람들은 연거푸 잔기침을 한다.

7.
안개 속은 언제나 비좁아 개인은 작은 괄호 속에 고인다. 따라서 가느다란 행간만이 존재할 뿐 아무 말이 오가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과거를 기다리며 안개를 버텨내는데 그들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바지의 해진 밑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두가 발소리를 죽인다.

8.
안개 속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굴뚝을 부려 놓고 숨을 고른다. 그들은 타인의 굴뚝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이들은 발꿈치를 들고 총총히 뛰어간다.

9.
그대 떠나버리고 나는 목 놓아 울었네. 울 때마다 그림자만 흥건해져요.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유행가가 흘러나오면 그제야 사람들은 누락된 굴뚝이라든가 빠진 손톱을 찾아 나선다. 그건 모두의 이중생활일 뿐 밑줄이 사라져 핵심을 알 수 없는 손바닥과는 상관이 없다.

10.
안개 속에서 책갈피 같은 코를 가진 남자가 복권을 판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라 미련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지. 그런 점에서 복권과 안개는 참으로 닮았어. 안개 속에서 남자는 복권을 나눠주고 사람들은 녹슨 동전으로 은박을 긁어냈다.

11.
너덜너덜해진 안개의 끝 피에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딱딱한 오줌발로 안개를 적시고 나는 오줌을 피해 바짝 엎드린다. 안개의 밑창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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