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는 324개. 하지만 연락할 곳은 없다.
사진 | 송민지 기자 ssong@

#. 월·수요일 3,4교시 수업이 끝나면 수영(가명, 문과대 한문12) 씨와 지수(가명, 문과대 한문12) 씨는 항상 같이 밥을 먹는다. 같은 학과인 두 사람은 우연히 겹친 시간표 덕에 밥만 같이 먹는 이른바 ‘밥Mate’가 됐다. “어?! 지수야 저기 뒤에 앉은 사람 우리랑 수업 같이 듣는 사람이다” 과 정원이 소수다 보니 같은 전공생끼리 수업을 2~3개씩은 같이 들어 서로 친하진 않아도 얼굴은 자주 본다. “맞네. 나 저번에 서관 1층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어색해 죽는 줄 알았어”
  사실 수영 씨와 지수 씨의 관계도 깊은 관계는 아니다. 신입생 때는 같은 반 친구일 뿐 친하지 않았는데 올해 전공을 들으며 수업이 겹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고 늘 밥도 함께 먹게 된 것 뿐이었다. “어제 상속자들 봤어?”, “걔 진짜 어이없지 않아?”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얘기는 주로 연예인 얘기, 다른 사람 얘기, 과제 얘기가 전부다. 서로에 대한 속마음은 잘 말하지 않는다. “우리 시험 끝나면 그 영화 보러 가자” 이런 말은 많이 하지만 한 번도 이 친구와 학교 밖에서 논적은 없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대부분 시험공부 하다가 모르는 게 생기거나 과제에 대해 애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험기간에는 오히려 경쟁자로까지 느껴진다.
  “수영아 지수 저번에 토익본거 점수 어떻게 나왔대?” 다른 친구들은 이 두 사람을 둘도 없는 단짝친구라고 생각한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감해하며 멋쩍게 웃던 수영 씨는 순간 생각한다. ‘아 그러고 보니 지수와는 사소한 얘기라도 사적인건 잘 안했네.. 우리 진짜 친한 거 맞나..?’  

#. 기자의 취재 요청을 받은 혁수(가명, 생명대 식자경11) 씨는 기자에게 자신이 느꼈던 점을 하소연 하듯 내뱉었다. 혁수 씨 휴대전화에 기록된 전화번호는 대학 지인만 300여 개가 넘는다. 과 동기, 선후배만 해도 150명은 된다. 여기에 그동안 팀플을 같이 했던 사람들, 동아리 사람들, 심지어 동아리에 들어왔다가 하루 만에 나간 사람의 전화번호까지 있다. 물론 1학년 때 소개팅 했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번호도 있다. “그러면 뭐해요. 이 중 진짜 연락하고 지내는 학교 사람은 열 명도 안 되는데….”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동기들마저 다 군대에 가서 혁수 씨는 최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연락을 자주 안했던 지인에게 먼저 연락할 용기는 없고, 중, 고등학생 때 친했던 친구들은 학교가 머니까 자주 못 만나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 혁수 씨는 동기 중 그나마 친한 친구가 불러서 선배들과의 술자리를 가졌다. 처음 보는 선배들과 밤새 술 마시면서 얘기도 많이 하고 노래방 갔다가 그 중 자취하는 선배 집에서 잠까지 잤다. 선배와의 친분은 그 날까지였다. “막상 일주일 뒤쯤 길가다 만났는데 어색한 인사만 나오더라고요” 혁수 씨는 오늘도 과방에 가서 남자 후배와  PC방에 갈 거라고 말한다.

메마른 깊은 관계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정도의 친구가 아닌 겉으로만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 ‘겉친’, 밥만 같이 먹는 친구를 의미하는 ‘밥Mate’ 등의 신조어는 현 세태를 반영한다. 선후배 간 종적인 관계가 줄어든 것은 오래, 또래끼리의 횡적인 관계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대인관계는 모든 세대가 겪는 문제이지만 20대에겐 시기적으로 두드러진다. 발달심리학적 입장에서 대학생 시기는 타인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성숙한 대인관계의 기초를 구축하는 중요한 심리 사회적 발달단계이다. 대학생 시기는 후기 청소년기에 속하면서도 초기 성인기에 속하는 과도기 단계에 있다. 이 시기 친밀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법을 제공받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박상천(한양대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은 현대 가족구조가 핵가족화 되면서 형제, 자매의 수가 적거나 없고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라다 보니 또래와의 소통에 서툴다”며 “또한 과한 교육열로 인해 친구와 대화하고 함께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관계형성능력의 기회를 놓친 채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말했다.
  대학생의 특성상 청소년기보다 인간관계의 유지가 힘들다. 중고등학교 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야간 자습까지 하다보면 거의 하루 종일 함께 한다. 김태형 심리학과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나마 일과가 비슷하고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 동질감을 느끼기 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생은 다르다. 수업 선택의 자율권에 부여돼 사전에 시간표를 맞추지 않는 이상 동기와 만나기가 어렵다.
  그 관계마저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팀플, 학회 등 사람을 만나는 경로의 수는 많고 다양해졌지만 인사하기조차 어색한 만남도 늘어났다. 모임에 나가면 과제나 학회 주제와 같이 목적에 맞는 이야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이런 만남이 증가하고 주변에 깊은 사귐이 없다는 걸 느낀 많은 대학생은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되고 충족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실존적 공허’ 상태를 느끼고 대인관계를 어려워한다. 박상천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대학생이 폭넓게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며 “대학생이 점차 소통의 폭은 좁아지고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두려워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형식적인 만남을 갖는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 최다희 전문기자

온라인 관계의 역설
  최근 사람 사이의 만남과 대화는 면대 면에 휴대전화, 컴퓨터 등이 더해졌다. 의사소통 수단의 폭이 넓어져 만남의 횟수는 활발해 졌지만 온라인 만남은 오프라인 속에서의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온라인 속 만남이 오프라인의 ‘친구’를 대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사용하는 사람은 고민이 생기면 익명게시판에 올려 위로와 상담을 받고, 게임 속에서 만난 친구와 대화를 한다. 이런 관계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아 어색해질 일이 없고 바로 관계를 끊고 새로운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 김태현 심리학자는 “온라인 관계는 깊은 인간관계 형성이 어렵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며 “오히려 직접 만나서 이뤄지는 관계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그 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경쟁하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지금 대학생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강요받고 점수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자라왔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도 학점, 스펙, 취직이라는 관문 앞에서 경쟁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이상민(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는 “이런 경쟁 심리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해치고 불안감을 증폭시킨다”며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시간이 없다고 느껴 대인관계에는 소홀해 지는 것이다”고 말했다.
회피로서 2차집단
  대인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은 결국 정서교류를 중요시하는 1차집단보다 이해관계의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2차집단에 치우치게 된다. 최근 대학생들은 가족, 친지와 교류할 시간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이 줄고 동문회, 동창회와 같은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다. 반면 ‘토익시험 준비 스터디’, ‘경제학회’ 등과 같이 목적이 있는 모임에 관심이 많다. 김환희(문과대 사회12) 씨는 “반 행사나 동아리 뒤풀이 같은 경우 가끔 참여하지만 가서 친하지 않은 선후배와 특별한 얘기도 나누지 않고 어색하게 술만 먹다 온다”며 “그렇다고 친목이 쌓이는 것 같지도 않아서 차라리 하나라도 배우는 모임에 참여하는 게 훨씬 낫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은 취미, 취향이 같은 사람끼리 모인 모임 역시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모임마저 친목이 이뤄지지 않고 오직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공유가 주목적이 된다. ‘이 갤러리에 올린 글에는 이 가수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가수와 관련 없는 개인적인 글, 친목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 등은 미리 차단하겠습니다’고 명시돼 있는 한 유명 가수의 갤러리 공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홍준(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2차집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익공유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며 “등산과 같은 모임을 통해서는 1차집단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처하는 나홀로 서기
  형식적인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 학생들은 ‘혼자’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최근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는 등 무엇인가를 혼자하는 ‘나홀로족’이 증가하고 있다. 독서나 TV보기와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행해지는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가생활 뿐만 아니라 영화 및 공연 관람과 같은 문화소비까지 혼자 즐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ENT가 2009년 집계한 자료를 보면 1인 1티켓 구매 수는 2006년 9만6000건, 2007년 14만 1000건, 그리고 2008년 21만 4000건으로 증가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증가 추세에 맞춰 공연 기획사들은 1인 관객을 위한 가격 할인 이벤트를 마련하고, 커피 전문점은1인용 좌석을 늘리고 혼자 온 사람들을 위해 매장에 다양한 잡지와 도서를 비치하는 등 혼자 여가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참사리길에 있는 노래방 ‘신인류’는 소수를 위한 노래방으로 하루 20~40명 정도는 혼자 오는 손님이다. 김태형 심리학자는 “1인 문화가 발달하는 분위기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편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며 “스스로 혼자가 더 좋다면서 타인과 교류하려 하지 않고 혼자가 되려 한다면 심리적으로 외로움이 증폭될 수 있다”고 말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한 노력
  현 20대는 과도한 학업스트레스로 인해 학점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을 학점 하나로 둘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로 분화시키고 다르게 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상민 교수는 “학점이 나쁘면 자신을 상당히 저평가 하며 인간관계도 미숙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오히려 ‘나는 성적은 안 좋은데 인간관계는 좋아’라고 말하는 학생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한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우월하면 주눅 들고, 자신을 얕잡아 볼까봐 불안해면서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을 만나면 우월감에 취해 있는 것은 좋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김태형 심리학자는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건강한 관계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마음을 열고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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