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올해로 탄생 450주년을 맞았다. 탄생한 지 450년이 지났음에도 작품에 드러난 셰익스피어의 통찰은 시대와 장소를 꿰뚫는다. 본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오늘날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명해봤다.
 

 1564년에 태어나서 1616년까지 52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살다간 셰익스피어는 37편의 희곡과 소네트 시편 등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탄생 이후 올해로 45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히고 연구되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의 배경, 인물, 줄거리 등은 21세기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셰익스피어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명작으로 읽히며 온 세계의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며, 또학교에서 교재로 다루어지고 있을까? 그것은 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거기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인생의 문제들을 드러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을 제시해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나날이 인생의 본질을 놓치며 물질 지향적이 되어가는 현대사회에 더욱 필수적인 독서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는 인생에서의 실제(reality)가 외관(appearance)과 다르다는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비극을 겪게 되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인생에서 추구하는 외면적인 가치들이 우리를 미혹에 빠지게 하는 환상일 뿐임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고, 보이는 것만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놓치기 쉽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을 야기시키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의식이며,
▲ 오필리어의 묘 앞에 선 햄릿과 호레이쇼 들라크루아(Delacroix) 作

분리된 자아 의식과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한 인생은 한 순간도 안정될 수 없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불안한 것이라는 진실은 저 창세기 에덴 동산으로부터 이어져 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자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으로 인한 삶 자체가 환상이라는 전제를 셰익스피어는 그 비극의 기저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들이 환상에 속아 비극적 상황에 부딪치기는 하지만 그 비극적 상황은 환상이 깨지는 계기가 되고 설사 그 비극적 결말에서 다시 행복한 상황으로 복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숙해가는 삶의 과정임을 작가는 전하고 있다. 그래서 『리어왕』에 나오는 지혜자, 에드가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성숙”(Ripeness is all.)이라고 말한다. 즉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주인공들은 ‘삶은 고통을 통한 성숙의 과정’임을 일깨워준다.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통찰의 눈을 뜨고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분별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극들을 자세히 읽다보면 “보라! 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 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환상에 속지 말고 인생의 실체를 잘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이성과 분별력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를 보지 못하면 인간 세상은 스스로 만드는 지옥 속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 혼돈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선과 악의 대립 가운데 선이 패배하는 듯이 결론지어지는 비극들을 통해 도덕적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선과 악의 대립과 그 승패를 가르는 이원법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가 자기 중심적 관점에 매여 있을 때 다른 반대편의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음에 대한 경고 역시 그의 작품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 괴로워하는 오셀로"누가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Who can control his fate?)" (5막 2장 265행)

 또한 셰익스피어는 많은 작품들에서 우리가 어떤 일생을 살든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시하고 진정한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야 함을 극화하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같은 로마 비극을 통해서는 “인간은 반사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대사를 시작으로 자만에 빠진자들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아정체성을 찾지 못한다는 인생의 영원한 주제를 극화 하고 있다. 『자에는 자로』같은 작품에서도 인간관계는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인간이 공격하고 심판하는 대상은 사실은 자신의 투사라는 것을 주요 메시지로 전하고 있다. 또 이 작품들에서는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향한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 절제되지 못하고 타자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으로 발휘될 때 그 교만이 결국은 자신마저 파괴하는 힘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가 이러한 이기적 힘에의 의지로 악순환될 때 역사는 비극의 역사로 이어져갈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경고도 읽을 수 있다.

 반면에 그의 희극들에서는 인생의 승리가 눈에 보이는 외면적 힘을 향해 손을 뻗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실천할 때 신, 또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은혜로 받는데 있다는 것을 조명하고 있다. 비극이 권력의 중심인 궁정이나 도시에서 서로 경계선을 만들며 대립하고 갈등하는 구조라면 희극은 온갖 생명이 조화롭게 숨쉬는 숲이라는 공간에서 사랑과 결혼의 결실이 맺어지는 구조를 공유한다. 즉 희극은 꽃과 나무들이 경계선 없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화해와 조화를 주제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권력투쟁이 중심을 이루는 궁정이나 도시의 공간과 용서와 사랑, 결혼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공간을 대조시킴으로서 인간 삶에서의 진정한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 『한여름 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심벨린』,『페리클레스』,『겨울 이야기』,『태풍』등에 나오는 숲과 바다는 구원의 공간이며 이런 작품들에서 작가는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부조화는 자연의 사랑 속에서 치유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문제극들이라고 범주화되는 『베니스의 상인』,『끝이 좋으면 다 좋다』, 『겨울 이야기』등은 진취적인 여성구원자들이 등장하는 특징을 공유한다. 비극적인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여성성은 병을 치유하며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고 희망의 근원임을 드러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의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나는 생명력 있는 구원자적 역할을 하는 여성을 등장시켜서 여성의 모성성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희극이나 비희극들에서 셰익스피어는 자연과 모성성이 함께 하는 생태여성주의가 인류를 파국에서 구원할 수 있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을 일으키고 발전시켜온 인류가 그 명분으로 자연을 파괴해왔지만 이것을 회복하는 것은 생태 여성주의적 가치관임을 예언한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가는 듯 보이는 현실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생은 좋은 직장과, 돈이라는 힘과, 권력만으로 의미 있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화해와 조화의 세계에 있으며 환상을 좇느라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다면 영광스러울 것 같은 권좌에 오른다해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일뿐이라는 것이 셰익스피어 의 비극들이 주는 교훈이다. 또한 분리된 자아 의식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경계선을 허무는 포용과 조화의 정신이 인생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희극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지면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타난 인생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 담아낼 수는 없지만 파도 거친 인생 항로를 향해 가야하는 대학생들이 항해에 앞서 확실한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특별히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 되는 올 한해, 한 번쯤은 꼭 셰익스피어의 세계를 만나보기를 권유한다.

이행수
대전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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