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에 열린 〈전조선 전문학교축구 연맹전〉을 시발점으로 5개 종목의 경기로 이뤄진 첫 정기 고연전은 1965년에 열렸다. 하지만 정국 혼란과 1960년대 후반 위수령 실시에 따른 본교의 휴교령 실시로 인해 열리지 않는 해도 많았다.

1960년대에는 5·16사태로 인해 운동부가 해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로인해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고 다시 정기 고연전을 개최됐을 때 그 후유증으로 경기 내용이 한동안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65년 전까지는 정기 고연전은 열리지 않고 단지 연대와 맞붙는 경기를 고연전이라고 지칭했다. 1965년에 부활된 고연전은 정기 고연전이라는 명칭으로 연세대에서  처음 시작, 번갈아가며 주최하게 됐다.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1965년부터 열린 정기 고연전에서 보여준 학생들의 열기는 폭발적이었다. 많은 응원곡들이 만들어지고 여성응원단장도 등장해 학생들의 열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경기 후 가두행진도 있었다. 김우수(경제학과 60학번) 씨는 “당시 학생들의 고연전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정기 고연전이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가두행진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김동성(물리학과 65학번) 씨는“승패에 관계없이 양팀 학생들 모두‘이겼다’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1960년에 열린 고연전에서는 동국대가 연대를 응원한다는 것에 격분한 본교 학생들과 연대생들간의 폭력 사건은 일어나 한동안 고연전이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60년대 정기 고연전은 당시까지 대학간의 경쟁이라는 명목아래 스포츠 경기가 열린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서울운동장에서 시청 앞까지 이뤄진 가두행진을 많은 다른 대학 학생들은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당시 사회가 혼란스러웠지만  1970년대에 비해 학생들의 가두행진에 대한 경찰의 제재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정기 고연전이 긍정적으로 비춰졌음을 알 수있다.

예전과 달리 고연전의 비판이 일고 있는 것에 이화복(사회학과 63학번) 씨는 “즐기는 문화라는 인식 아래 우월주의는 버리고 전통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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