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문에서 1111번 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정거장에 내리면 나무가 우거져 5월이면 푸르른 녹음이, 10월이면 잔잔한 단풍이 드는 빨간 담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엔 빛나는 보배를 모아둔 집이 있다. 간송미술관의 ‘보화각(保華閣)’이다. 올해 5월 전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로 대신하지만 고즈넉하고 아담한 간송미술관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간송미술관이 존재하는 것은 간송 전형필 선생 덕분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재산을 문화재 수집에 썼으며 그가 수집한 문화재들이 현재에 이르기 까지 소중하게 보존되도록 했다. 간송 전형필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무언가를 1만개를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끈기를 요한다. 하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은 본인의 일생과 재산을 바쳐 고서적 1만 여권과 미술품 3000여 점을 수집했다. 이중에는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한국 문화의 근간이 다수 포함돼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 보호해 나라를 지켰다고 평가 받는다.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문화재를 모으고 해외로 반출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지켜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와집 400채를 살 거금으로 도자기 20점을 인수하고 당시의 대기업인 일본의 상회와 경매에서 맞붙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간송 선생이 하나씩 소장하게된 문화재는 현재까지 한국 미술사학계를 발전시킨 주요 자료가 됐다. 오세현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몽유도원도처럼 일본에 소장되었다면 미술사 연구에 제약이 많았을 것”이라며 “간송 선생이 겸재 정선의 주요 작품을 보존했기에 ‘진경산수’라는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다”며 이라고 말했다.
 간송 선생은 1906년 배오개(현재 종로구 인의동)에서 2남 4녀 중 늦둥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각종 벼슬을 지내고 배오개 상권을 장악하면서 서울일대와 충정도, 황해도의 대지주로 거듭난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필은 어의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신식교육 받았고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했다.
 간송 선생이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그는 14살에 막대한 재산을 지닌 집안의 적손이 된다. 전형필 선생은 후사가 없는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작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그의 친형인 전형설이 28살 젊은 나이로 요절해생가의 재산도 물려받았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민족 문화주의 철학> 논고를 저술한 장재천(용인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어려웠을 일이지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간송은 민족문화수호 일념으로 문화재 수집에 할애했다”고 평가했다.

▲ 간송 전형필 상
 간송 선생이 고려·조선 문화재 중에서도 정수만을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인의 도움도 컸다. 휘문고보 시절 미술선생님이자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의 소개로 만난 오세창은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일종의 ‘멘토’ 역할을 했다. 추사 김정희의 제사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이자 신라대부터 우리나라의 서화·글씨를 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저술한 오세창은 간송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감식안을 키워주는 스승이었다. 오세현 연구원은 “간송은 29살부터 문화재 구입을 시작했다”며 “할아버지 벌이었던 오세창 선생의 미술작품에 대한 조언과 도움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손과 발이 돼준 거간꾼 덕분에 간송 선생은 다양하고 많은 문화재를 수장할 수 있었다. 거간꾼이란 간송 선생대신 경매에 나가거나 전국의 유명 문화재를 보유한 사람을 수소문해 문화재를 사들인 중개인을 말한다. 간송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거간꾼은 이순황이다. 간송의 수집활동은 경영위기에 처한 한남서림을 이순황을 대리인으로 삼아 인수하고 더욱 활기를 띤다. 장재천 교수는 “당시 국내에서 고서적과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곳이 없었다는데 그런 중심거점이 된 곳이 한남서림”이라고 말했다.
 그 예전에도 미술품 수집은 재테크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문화재 보존과 전수’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세현 연구원은 “심사정의 ‘촉잔도권’은 간송 선생이 당시 5000원을 주고 구입했지만 6000원을 들여 복원을 했다”며 “단순히 부를 축적하기 위해 미술품을 사들였다면 보존할 돈으로 다른 미술품을 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병선(인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도 “그 시대에도 이재를 위해 문화재를 수집한 사람이 많았다”며 “‘지켜내고자’했던 의지가 간송이 가진 차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간송은 문화재의 미래 전수를 염두에 두었다. 신간 서적을 구입할 때면 복수로 갖춰 분실과 소실에 대비했다는 일화는 문화재와 보존에 대한 간송의 혜안과 아량을 보여준다.

 간송학파로 이어져 오는 간송의 정신
 간송 전형필 선생이 소장·보존한 미술품은 현재까지 ‘간송학파’가 연구하고 보존하고 있다. 간송학파의 일원으로 조선 백자를 연구해온 방병선 교수는 “학문을 하고자하는 의지가 모여 연구를 해온 것이 바로 간송학파”라며 “수 십 년 간 전형필 선생의 뜻을 지키고 이끌어온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미술관에서 일 년에 두 번 전시에 맞춰 도록과 함께 발간하는 연구 논문집인 <간송문화>는 간송미술관이 발전해온 원동력이자 다른 박물관과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오세현 연구원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또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바로 연구논문”이라고 말했다.

 간송미술관, 간송의 뜻을 담다
 간송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전형필 선생의 후손과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이 전형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1971년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각각 14일 간 전시한다. 전시는 모든 소장품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화훼영모대전’, ‘진경시대화원전’처럼 일정한 테마를 가지고 이에 알맞은 소장품만 공개한다.
이태준의 생가와 변종하 기념 미술관 등 고즈넉한 고건물 많은 성북동이지만 간송미술관의 전시실인 ‘보화각(保華閣)’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보화각은 1938년 간송 전형필 선생에 의해 만들어졌다. 최완수 연구소장은 간송 전형필 평전에서 ‘전시체제로 공출이 이뤄지던 시기에 문화재를 지키고자 만든 호화로운 근대식 건물, 보화각은 문화적 항일의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또한, 오세현 연구원은 “우리는 어딜가나 똑같은 것이 있는 체인점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의 뜻을 새길 수 있는 장소성을 지닌 곳은 보화각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간송미술관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가기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도 변화의 한 부분이다. 간송의 문화재들은 43년 만에 성북동 보화각을 떠났고 전시의 방법의 변화를 위해 새 단장을 시작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국내 박물관법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전시 기일 등 박물관 등록을 위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민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300일 이상 개방해야 등록이 가능하다”며 “간송미술관은 전시보다 연구에 목적이 있어 여건상 오래 개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간송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연구기관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앞으로 시대의 흐름과 관객들의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 작년에는 간송문화재단이 출범시키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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