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골 학생들이 구두를 닦는 동안 안암골 학생들은 책을 읽었다고도 하고 신촌골 학생들이 맥주 마시며 노는 동안 안암골 학생들은 막걸리를 기울이며 나라 걱정을 했다고도 한다. 지금의 고대생에게는 낯선 고대생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개교 109주년을 맞아 고려대 안팎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들을 만났다.

 뒤바뀐 정문 앞과 참살이길 모습


 정문 앞 제기동 주민들은 고대 주변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제기동 주민 성수연(여·69) 할머니는 80, 90년대의 본교 정문 앞은 지금과 달리 번화가였다고 말한다. “당시 학생들 대부분이 지방에서 올라와 제기동에 하숙집을 많이 구했어요. 정문 앞 상권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러운 번화가가 형성됐죠. 안암동이나 참살이길은 거의 산동네 같았어요”
 1960년에도 하숙집을 운영했었다는 강정순(여·74) 할머니는 당시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자식같이 지내던 학생들을 떠올렸다. “학생들이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가족이 그리워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옛날에 유독 정이 많았던 건지 제기동 주민들과 고대생들은 거의 한가족이라 생각하고 지냈어요. 하숙생들이 졸업하고 나서도 서울에서 고시공부나 취업준비를 하니까 7년 8년씩 오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식구가 됐나 봐요. 고연전 같은 축제 때가 되면 학생들이 캠퍼스 안으로 막걸리 마시러 오라고 주민들을 초청하기도 했었죠.”
 제기동에 학생들의 발길이 줄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 후문이 세워지고 안암병원과 안암역이 들어서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서울 학생이 많아져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면서 하숙집보다는 안암동 참살이길 근처의 원룸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현재 제기동 하숙집에는 저렴한 방을 찾아온 학생들과 몇몇 외국인들만이 있다고 한다.

 
시골 소년소녀가 서울 깍쟁이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교 안에서 학생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고대생의 모습에서 점점 개인주의적으로 변하는 양상을 느낀다고 말한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본교에 재직 중인 김언종(문과대 한문학과) 교수는 본교 교수로 부임할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학교는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고 말했다. “옛날 학생들은 분명 큰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국가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묻거나,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가장 대학생활의 지표로 삼았죠.”
 예전에 비해 젊은 학생들의 기개를 느끼기 힘든 지금의 상황을 두고 김 교수는 아쉬움 마음을 전했다. “학교가 큰 직업훈련소 혹은 학원의 형태로 점점 변해가고 있어요. 우리가 한때 갖고 있었던 이상주의적인 분위기가 학생들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학교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유광렬 시설부 직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학생들을 봐 오면서 학생들의 성격이 ‘깍쟁이’ 같아졌다고 말한다. “80년대 학생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와 매우 순진하고 천진난만했어요. 시설부 직원들은 축제 때마다 물품이나 인력을 지원해주면서 학생들을 자주 만나는데, 80년대, 90년대 이렇게 10년씩 끊어보면 학생들의 모습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옛날 학생들은 아저씨들한테 항상 고맙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정이 많았죠. 이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깍쟁이에요(웃음).”
 1982년 본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고 현재는 직원으로 학교에 몸담고 있는 백완종 에너지위기관리 대응팀 과장은 학생들의 외적인 모습도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70~80년대 만해도 70%가 지방학생이었는데 요즘은 70%가 수도권 학생들이에요. 이렇게 구성원이 변모하다 보니 시골풍, 막걸리 이미지, 허름한 잠바와 청바지 이미지와 같은 패션도 많이 세련돼졌고, 나아가 경제적인 측면도 요즘 학생들이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고대정신

 외부에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본교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학생들의 ‘시위활동’이다. 개운사에서 20년간 지내온 길상화 보살님은 90년대 당시 안암동은 매일 최루가스가 가득했다고 말한다. “고려대가 특히 학생운동으로 유명했죠. 제 발 앞에 최루탄이 떨어져 크게 다칠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군인들도 안쓰럽고 학생들도 안쓰러웠어요.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시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장갑차가 다니고 최루탄이 매일 터지고 외신 기자들이 몰려와서 취재하는 상황에서 한참 시위하던 학생들이 개운사로 도망쳐 들어와 절에 몰래 숨어들어와 있다가 나가기도 했었다.
 제기동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하숙집 골목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제기동 골목마다 터지는 최루탄에 주민들도 꼼짝없이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됐다. 그러면서도 제기동 주민들은 학생들이 숨을 곳을 찾아다니면 항상 문을 열어줬다. 강정순 씨는 70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피할 곳을 찾기에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적이 있었죠. 고려대 학생들이라면 다 아들딸 같다는 마음에 그 난리 중에도 숨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81년도에 본교에 입학한 윤견수(정경대 행정학과) 교수는 캠퍼스 곳곳에 사복경찰과 학생 프락치가 숨어있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때는 군사정권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학교에 있으면 사복 입은 경찰들이 들어와서 대화를 엿듣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잡아가기도 했죠. 군사정권이 고려대 교훈인 자유, 정의, 진리를 억압했고, 이 때문에 학생들이 어떠한 부당함을 느끼고 저항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윤 교수는 이러한 ‘고대 정신’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학교를 자퇴한 김예슬 양이나 ‘안녕들 하십니까?’와 같은 모습을 보면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것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통이 없었으면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동참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요.”

 
고대생과의 특별한 인연
 본교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본교생과 얽힌 특별한 에피소드도 있다. 1대에 이어 현재 2대까지 제기동에서 53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 ‘고모집’의 2대 고모 이순이(여·56) 씨는 졸업생들과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3년 4월 13일 고려대 82학번들이 입학 30주년 모교 방문 행사를 위해 학교를 다시 찾았어요. 그들이 우리 가게 외상장부에 적혀 있던 연간 외상값 385만 원을 갚으려 했는데 외상을 해준 1대 고모는 이미 그만둔 상태였죠” 졸업생들은 2대 고모에게라도 외상값을 갚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1대 고모와 학생들의 정을 감히 돈으로 받을 수 없다며 전액을 본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정대 후문에서 20년간 복사집 ‘후문사’를 운영한 정 모 씨는 몇 년 전 한 학생이 두고 간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건넨 연두색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한 장과 워드로 쓴 편지 한 장이 같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가난했던 학생 시절 가끔 거스름돈을 더 가져오거나 복사 값을 덜 내고 와서 죄송했다’는 내용이었다. 정 씨는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 학생들에게 느끼는 아쉬운 마음도 전했다. “이전에는 축제 때 학교 안에 들어가서 학생들과 같이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었는데. 작년 축제 때 학교에 들어가 보니 예전과 많이 다르더라고요. 학생과 외부 사람들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 아쉬웠어요”
 현재 직원장학회의 일원인 유광렬 씨는 같은 생각을 가진 직원들 500명과 함께 면학장학금 반액을 25년째 학생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얼마 전 직원장학회에 돈을 더 모아서 5년 내에 학생들에게 전액장학금을 주자고 건의했어요. 그 일환으로 저도 300만 원을 추가로 보탰고요. 고려대 학생들이 낸 돈으로 받은 월급이니, 저도 받은 걸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유광렬 시설부 직원은 학생들과 술 담배를 같이 나누면서 인연을 맺은 순간들을 그리며 ‘학생과의 인연이 근무하면서 얻게 되는 결실’이라고 말했다. “예전보다는 분명 덜하지만 그래도 일하면서 학생들한테 인사를 받으면 그게 그렇게 좋아요. 이런 것들 모두가 분명히 소중한 인연이거든요”

글│한재윤, 추연진 기자 news@
일러스트│홍유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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