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고연제는 정치적인 압력으로 두 번이나 개최되지 못하는 등 단순한 축제가 아닌 학생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진행됐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시가행진은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고연제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시가행진은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는 일이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폭력 경찰 타도’,‘직선제 쟁취’,‘군부독재 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으로 연결됐다. 이 과정에서 전투경찰이 무장을 하고 학생들의 시가행진을 막아양교생 2백 여명이 연행되는 등 많은 탄압 사례가 있었다.

또한 “총학생회를 지지한다” “총학생회를 인정하라”등이 개막제의 구호가 되기도 했다. 1983년도에는 고연제의 아마추어리즘의 퇴색과 파열을 염려해 ‘정기 고연전 개선 위원회’가 구성됐고, 당시 정기전 취소 해명을 요구하며 학생 2천 여명이 본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 당시 고연제 취소 배경을 놓고 외부 압력설이 제기되는 등 많은 논란이 일자 학교측은 “사회적 분위기와 연세대측의 반대로 개최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1984년도의 고연제는 정기전의 새 방향 모색으로 △학술제 △민속제 △문화제 등 을 추가해 다양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전투경찰이 명동에서 대학생 통행금지를 실시해 과거처럼 모여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1985년 고연제에서는 당시 사회문제에 초점에 맞춰 개최된 방송제가 첫날 방송한 작품 내용을 문제삼은 외부의 압력으로 둘째날 취소됐다. 뿐만 아니라 개막식에서 양교 학생 대표 연설을 할때 학교에서 운동장의 마이크를 꺼버려 응원단 마이크를 통해 대독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어둡고 치열했던 당시 고연제에도 축제다운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1986년에는 농구경기 중 선수들 간에 몸싸움이 일어나자 양교 응원석에서 빵과 우유를 던졌고 이로인해 경기장이 미끄러워지자 경기를 무승부로 중단시켰다. 또한 1988년에는 본교가 고연전 1승 3패 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던 중 축구 경기마저 패색이 짙어지자 본교생이 축구장에 난입해 연세대 골대를 향해 슈팅을 날리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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