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고연제의 모습은 어땠을까. 1990년대 역시 △개막제 △고연연합방송제 △범고연인한마당 △체육제 △합동 응원전 △폐막제 등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출범을 기점으로 1980년대와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1980년대의 경우 독재정치에 맞서 정치·사회적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1992년에는 애기능 거리 문화제로 ‘시민·전경·학생 한마당’ 이 펼쳐졌다. 이 행사에서 성북 경찰서 전경들과 성북 구민과 본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95년 학생운동의 주요한 이슈는 통일이었다. 이와같은 영향으로 1995년 개막전 행사로 북한 학우를 생각하며 ‘소원줄’ 만들어 태우기도 하고 민족노래 한마당에서는 ‘5월 이야기’ 와 ‘ 통일 운동’을 주제로 노래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 이듬해인 1996년 고연제는 ‘8·15 통일 대축전’ 중 벌어진 연대 사태로 무산될 뻔했으나 결국 체육제는 빼고 양 총학에서 준비한 행사만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이 같은 다양한 외형적인 모습에도 고연제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도는 점차 떨어졌다.

1990년대 매해 고연제의 목표는 ‘대중의 능동적 참여’였다. 하지만 실상 체육전을 제외한 학술제나 문화제 등에 학생의 참여가 부족해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1993년 고연제의 학술제는 단 하나의 주제 토론만 이뤄져 ‘학술제로의 승화를 통해 지성의 축제로 발전시키자’는 그해 고연제의 명칭 변경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이후 고연제의 모습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1994년 고연제에서는 학생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공간’ ‘길거리 농구 대회’ 등 행사가 열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놀이 마당으로 흘러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1990년대의 고연제. 이에 대해 최재훈(정치외교학과 89학번) 씨는 “이 시기가 고연제의 과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며 “1990년대는 아무런 명분 없이 과거를 답습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거 같다”고  평가했다.

한편 IMF를 기점으로 199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1990년대 후반의 분위기는 또다시 반전했다. 1990년대의 시대 변화 속에서 부침을 겪었던 고연전이 앞으로 어떻게 나갈지는 본교생의 참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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