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하늘은 푸르지만, 5월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매년 이 시기에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진실공방이 뜨겁다. ‘사실’과 ‘왜곡’이 만연한 지금, 5.18관련 논쟁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5.18 기념재단이 발간한 <5.18왜곡의 기원과 진실>을 바탕으로 각 정권별 5.18 진실규명과정을 짚었다.

 전두환 정권: 시작부터 왜곡
 <5.18왜곡의 기원과 진실>에 따르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위한 안보위기를 조장한 것이 왜곡의 시작이었다.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하려 위해 북의 남침 위험설을 과장, 유포해 국가적 안보위기를 조장하고 5.18항쟁을 불순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했다. 이에 더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는데 악용했다. 신군부는 남·북간 대치상황을 이용해 북한의 남침이 예상된다며 심야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하지만 비상계엄 확대조치 단행의 근거로 활용된 첩보는 계엄 확대를 예상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는 군대이동을 단행했고 보안사는 ‘시국수습안’을 작성하고 예비검속자명단을 작성했다.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군의 정치개입이, 이어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결정됐다. 신군부와 보안사는 유언비어 유포를 통해 계엄군의 살인적인 진압과 신군부의 권력찬탈 시도에 대한 저항이라는 5.18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러한 왜곡은 언론을 통해 공고히 됐다. 언론은 ‘광주사태’, ‘광주폭동’으로 국민에게 기억되도록 만들었다. 5월 25일자 신문에 조선일보는 광주의 상황을 ‘폐허’로 칭했고, 경향신문은 ‘난동’으로, 동아일보는 ‘광주시민들에게 이성을 찾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신군부와 보안사가 발표한 21일 담화문에서는 5.18항쟁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직접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7월 31일 작성된 문건에서는 직접 연결시켜 사건의 내용을 신군부의 집권의도에 맞게 재구성했다.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5.18항쟁을 데모, 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으로 명명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은 지역민의 정당한 저항행위를 북한의 고정간첩과 김대중의 추종세력들을 지칭하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유발된 폭도들의 무장난동으로 폄하했다.
 5월 31일 이희승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을 통해 신군부와 계엄사령부가 5.18항쟁의 원인을 지역감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왜곡함으로써 민주항쟁을 축소·유폐시키고 집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태우 정권: 진실 규명의 ‘진실’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는 정권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이뤄졌다. 5.18항쟁에 대한 왜곡에 있어 논리적 허점을 보완했다. 1987년 6월 항쟁은 보수정권의 5.18항쟁에 대한 강경입장을 선회시키는 계기가 됐다. 6월 항쟁을 계기로 ‘광주 사태 치유방안’이 만들어지면서 국가차원에서 처음으로 5.18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광주항쟁에 대한 명백한 진상규명’을 강조했지만 왜곡은 더 치밀해졌다.
▲ 계엄군과 맞서는 시민들. 사진│ 촬영자 나경택(1980년 당시 전남 매일신문 기자), 제공│ 5.18 기념재단
 노태우 정부가 구성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5.18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발단이라 규정했다. 또한 진실 발견이 어렵고 조사가 지연됨에 따라 피해자 보상의 지체 역시 불가피하다고 기피했다. 결국에는 5.18의 진실규명이 국민의 화합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중단했다. 이러한 정부의 의도는 1988년 4월 1일 정부가 발표한 광주사태 치유대책에서 진실규명을 정략적으로 배제시킨 것을 통해 확인된다. 제 13대 총선의 여소야대 국면으로 구성된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는 5.18항쟁 진실규명의 전환점이 됐다. 위원회는 1988년 7월 8일 1차위원회를 개최한 이래 1989년 12월 30일까지 총 32회의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이어서 나타난 성과로 광주청문회가 개최됐고, 사건 관련자들이 국회에 출석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진술해야 하는 상황이 조성됐다. 그러나 진실은 전부 규명되지 못했다. 당시 작성된 ‘국회 광주 청문회 대비 자료’ 문건은 당시 군부가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자한 조직적 대응의 정황을 나타낸다. 당시 그들은 국방부 511위원회와 보안사의 511분석반이 대비자료를 작성했다. 국방부 511위원회는 진압작전 총괄 및 주요쟁점을 검토하고, 일자별로 시민들의 동향과 계엄군의 대응에 대해 정리했다. 한편 보안사 511분석반은 광주의 505보안부대 방문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의원 청문회에서의 역할까지 분담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자료에는 노태우 정권이 청문회에 대비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부각시켜 다른 쟁점을 상쇄시키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 마침내 단죄하다
▲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사진│ 촬영자 나경택(1980년 당시 전남 매일신문 기자), 제공│ 5.18 기념재단

 뒤이어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1993년 ‘광주의 유혈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며 현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로서 그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높일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영삼 정부는 진상규명이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 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처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입장을 표했다. 이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말해 관련 시민사회의 반발을 야기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선 진상규명, 후 명예회복을 요구했고 <12.12, 5.18 고소고발사건>으로 귀결됐다. 1994년 5월 13일부터 1995년 4월 3일까지 총 70여건의 고소·고발장이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로 접수됐다. 하지만 검찰은 ‘국가기관에 의한 최종적이고 완벽한 진상규명은 이루어졌다’며 1995년 7월 18일 ‘공소권 없음’을 공표해 시민사회의 반발을 샀다. 이때, 1995년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정축재 내용을 국회에서 폭로하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김영삼 대통령 은 5.18특별법 제정 지시를 내렸고 이에 의거해 12.12 및 5.18 특별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이로부터 이틀만에 두 대통령이 전격 구속됐고 이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위한 조사와 재판이 진행됐다. 1997년 4월 18일 대법원에서는 재판 도중 사망자를 제외한 15명에 대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형이 선고됐다.
▲ 신군부에 의해 끌려가는 광주 시민들. 사진│ 촬영자 나경택(1980년 당시 전남 매일신문 기자), 제공│ 5.18 기념재단
 이 사건으로 5.18 항쟁에 대한 보수 세력의 사고와 태도가 전환됐다. 5.18항쟁의 진실규명에 대한 보수 세력의 조직적인 반작용은 이 시기부터 본격화됐다. 정권차원의 대응과 보수적 시민사회의 침묵이 이전의 저항이었다면 사건이후 정권차원의 5.18 왜곡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와 같은 일부 언론이나 시민사회논객이 왜곡 담론의 근원지의 모습을 갖추게 돼 5.18항쟁에 대한 왜곡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18항쟁에 대한 왜곡 시도는 5.18항쟁의 진실규명의 과정과 연동돼 이뤄졌다. 진보세력의 진실규명운동에 대해서 일부 세력은 ‘왜곡’, ‘보수식 진실규명’로 맞섰다. 김영삼 정권시기 5.18특별법으로 상징되는 5.18항쟁의 제도화는 시민사회 진영의 분화를 촉진시키고, 대립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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