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날에>는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다소 무거운 5.18을 배경으로 한 연극임에도 올해로 4년 째 공연을 성황리에 맞고 있다. 15일 저녁, 남산 예술센터를 찾았다. 종소리와 함께 어둠이 걷히며 나타난 것은 그리스 아고라처럼 생긴 극장이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손에는 푸르른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1 관객들 사이로 절뚝거리는 한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민호의 형 진호다. 그는 민호의 조카이자 딸이기도 한 운화의 결혼소식을 전한다. 연극은 30년 전 사랑하는 사이였던 민호와 정혜의 모습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30년 전, 민호는 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정혜의 동생 기준은 전남대생 민호를 친형처럼 따랐다. 이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5월 18일이었다.

▲ 사진제공│남산예술센터
 “아 저기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윤정혜!” 연극은 현재의 주인공이 1980년 당시의 주인공의 모습을 회상하는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남산예술센터로 향하는 길에 올려다 본 푸르른 하늘이 떠오를만큼 주인공 민호와 정혜의 사랑은 순수했다. 중간 중간에 나와 차를 따르는 심부름꾼의 등장과 같은 해학적 요소는 무거운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한 연극임을 잊게 했다. 

 

#2 야학선생인 민호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이
▲ 고문받는 '민호'의 모습.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준'을 모른다는 거짓말을 한다. 사진제공│남산예술센터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것을 보게 된다. 학생들의 시위참여를 막던 민호는 적극 참여하려는 기준과 마주하게 된다. 정혜의 동생 기준은 민주항쟁에 적극 참여하려한다. 민호는 이를 말리지만 소용이 없다. 기준은 “진실을 바로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사람답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민호는 결국 기준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간다.

 #3 도청에 있는 시민군들은 계엄군과의 대치를 준비한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 12시 나는 보았다/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시민군들은 김남주 시인의 ‘학살2’를 외친다. 홀로 시작된 외침이 북소리와 함께 커진다. 그들은 울부짖었다.

 가슴이 울렸다. 무대 뒤편의 북소리 때문이었을까. 빨라지는 북소리에, 점차 커지는 배우들의 목소리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배우들은 불규칙적으로 시를 읽었다. 혼자 읽다가 여럿이 함께 읽었다. 소리도 질렀다. 속삭이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어느새 ‘5월 어느 날이었다’를 중얼거렸다. 전율이 일었다. 처참하고 치밀한 학살은 그렇게 5월 어느 날에 일어났다.

 #4 도청에서 살아난 민호는 고문을 받는다. 민호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진술을 한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허공에서 헐떡거렸다/똥개가 되라면/기꺼이 똥개가 되어/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진혼가(김남주 時)의 주인공이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자가 된 민호는 괴로워하다 정신이상을 겪는다. 그는 알량한 목숨을 구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정혜를 버린 채 불가에 귀의한다.

▲ 사진제공│남산예술센터
 “일부로 그런 게 아니에요. 무서워서 그랬어요” 살아남은 자들이 솔직하고도 고통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는 괴로워했다. 배우의 내면연기는 ‘배신자’, ‘알량한 목숨을 구지하기위해 거짓말을 했다’라는 주홍글씨 속에 괴로워하는 헤스터 같았다. 이를 지켜보던 여산(30년 후의 민호)은 “30년이나 지난일이다. 이젠 그만 놓아달라”며 함께 번뇌했다.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민호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5월의 광주를 마주한 우리의 모습이었다.

 #5 어느덧 운화의 결혼식장이다. 극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던 여산과 정혜는 운화의 결혼식장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그들 뒤에 서있는 면사포 차림의 정혜와 민호의 모습은 30년 전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제서야 이루어짐을 나타냈다. 

 연극은 역사인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광주를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민호와 정혜가 마주했듯, 우리는 자연스레 1980년 5월의 광주와 마주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송창식의 푸르른날에 노래와 함께 막이 내렸다.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은 말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로 역사를 배워온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과 의의를 강제적으로 학습해 온 것 일지도 모른다. 강요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에 현존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 일수도 있다.

 남산예술센터를 나오는 길에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는’이라는 의무감에 젖어 5월의 광주를 곁눈질 하던 나에게 “땅에서 엎어졌으니 땅을 다시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 대사가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 않았다. 5월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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