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고대신문 DB
 현대 우리 축제는 ‘슬프다’. 자본주의 논리와 정치적인 요소 등으로 인해 일상에서 억압된 우리의 본성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선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축제는 정말 축제다워야 한다”며 “축제에서 인간은 본질적 욕망과 근원적인 것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각종 축제 일정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실정이지만, 강릉 단오제는 그 전통과 명맥을 이어 진행된다. 김동찬 강릉단오제위원회 상임이사는 “강릉은 강릉답게 (슬픔을)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본교 석탑대동제 역시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본래 대동제가 가졌던 ‘대동(大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축제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가오는 대동제에서 우리는 축제를 더욱 의미있게 꾸려나가기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보다 의미 있는 축제를 위해 그 본질을 탐구해봤다.

글| 이지민 기자 mint@kunews.ac.kr

   대학 축제가 재학생들조차 외면하고 유흥으로 얼룩져왔다는 비판이 드세다. 축제를 빙자한 오락은 대학에서 사라져야 옳다.

   초파일, 크리스마스, 정월초하루, 정월대보름, 한가위는 물론 지역 특산물 축제, 공연예술제, 미술전시회, 꽃박람회, 록 콘서트, 올림픽 경기 그리고 심지어 자동차 경주 이벤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2002 월드컵 경기까지 축제로 인식된다. 오늘날에 이르러 축제는 크고 작은 이벤트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그 범위는 넓혀진다.
  
  축제인 것과 축제가 아닌 것의 경계가 흐려지는 중이다. 21세기는 축제의 시대이다. 축제의 일괄적인 정의가 더욱 불가능한 터이지만, 우리는 축제가 무엇인지 나름 짐작할 수 있고 축제를 즐긴다. 축제란 무엇인가? 포괄적으로 말해, 축제는 특정 공동체나 집단이 중시하는 공동 관심사를 부각시켜 함께 향유하는 행사이다. 축제는 크게 보아 축제를 수행하며 참여하는 집단, 이 집단이 조성하는 가상의 현실, 이 가상의 현실이 의도하는 주제 내용, 그리고 주제 내용을 구현하는 절차와 구체적 형식으로 구성된다.
 
  축제는 전통 사회의 의례(儀禮, ritual)에서 기원하였다. 대개는 ‘00제(祭)’라 지칭되는 행사들이 이런 의례에 해당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행하는 주기적인 행위도 의례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컨대 일상적으로 출근을 위해 날마다 반복하는 사소한 행동도 의례로 분류된다. 그러나 축제의 기원 시각에서 의례는 공동체가 희구(希求)하는 상징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거행하는 행사를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의례는 언어, 물품과 설비, 행동으로 구성되는 일정한 규범을 갖추어 일정한 시기에 거행된다. 원시 문명 단계에서부터 출현한 의례는 신앙을 포함한 종교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그 외에 사회적·정치적 그리고 씨족과 가문의 유대를 강화할 목적에서 엄청나게 다종다양한 의례들이 개발되었을 것은 능히 추정가능하다.

   우리말 축제로 옮겨 쓰는 페스티벌(festival)은 서구에서 14세기부터, 잔치에 해당하는 피스트(feast)가 13세기부터 사용된 역사적 사실은 근세 이후에 축제가 개념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축제와 의례는 발생 근원에서 동일하고 지금도 어떤 축제들은 의례로 분류되어도 무방하며 수많은 축제 속에 의례가 혼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 이후에 의례에 대응하여 축제라는 개념이 등장한 사실을 주목해보면 의례와 축제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의례와 축제가 상징적 가치 실현, 행사 진행 절차의 규범성, 공동체 유대 강화 측면에서 명백히 구분된다고 단정할 근거는 있지 않다. 다만 참여하는 주체들 간의 평등 관계가 높을수록, 행사 분위기에 자유분방함 정도가 높을수록, 진행 절차 규범성을 준수해야 할 정도가 낮을수록, 참여하는 개개인의 즐김이 높을수록 축제에 속하거나 가까워진다.

   인간은 왜 축제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공동체의 공동 관심사를 함께 향유(享有)하기 위해 축제를 한다. 비단 축제에서가 아니더라도 공동체는 공동 관심사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공유(共有)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축제는 공동 관심사를 함께 향유하는 방식을 취하고 별도의 장치를 동원하기 때문에 독특하다.

   축제에서는 일상이 한동안 정지되거나 유보되며 축제적인 또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 이 세계는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공동 관심사를 전제로 하므로 실상은 현실의 다른 모습이다. 다시 말해 축제의 세계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꿈꾸는 세계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축제의 시공간 속에서 축제 참여자들은 일상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고, 이는 일상 관계로부터의 해방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러니 축제가 즐겁지 않을 리 없다. 일상이 유보된 시공간에서 놀이는 몰입하는 데 중점을 두지만, 축제는 다른 일상을 희구(希求) 몰입하는 데 그 본성이 있으므로 축제는 놀이 이상의 놀이이고, 심지어는 놀이에서 벗어난다.
 
▲ 일러스트|최다희 전문 기자

  축제 가운데서도 카니발(謝肉祭, carnival)은 탈주와 해방에 가장 적극적이다. 사순절이라는 기독교의 일상에 진입하기 직전에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카니발에서는 일탈(逸脫)이 현저하다. 원래 카니발은 비기독교 사회에서 새해의 다산과 풍요를 소망하는 의례에서 기원하였고,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의 억압과 갈등 끝에 결국 부활절-사순절 의례와 연관해서 초봄의 축제로 다시 정착되었다. 만물의 소생 그리고 우주와 사회 질서의 갱생을 기원하는 카니발의 원초적 의도는 희생양 내세우기, 사회관계의 일시적 뒤집기, 액땜 의례 등을 통해 보편적으로는 쇄신과 부활을 염원하는 축제로 귀결되었다.

   축제에는 끝이 있고, 축제가 마무리되면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축제에서 해방의 시공간은 징검다리나 문턱 같은 과도기의 성격을 갖는다. 쉽게 말해, 축제 이전의 일상, 축제 현장, 그리고 축제 이후의 일상으로 요약되는 계열 내에서 축제는 축제 이전과 이후의 2가지 일상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계열은 축제 이후가 축제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는데, 축제 이후에 이전과 다른 일상을 맞이할 수 없다면 축제의 의의는 의문시될 것이다. 따라서 축제는 속성상 미래지향적이다. 축제 이후의 일상이 축제 덕분에 이전의 일상보다 호전(好轉)되었다면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축제 이후의 일상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의 여부는 축제 공동체가 내세우는 공동 관심사의 달성 정도에 따라 판별되어야 한다.

   축제에서 공동 관심사가 뚜렷하고 축제 열기가 왕성하면 축제의 역할을 달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거시적으로 보아 축제의 사회적 역할을 둘러싸고 양론이 존재한다. 먼저 축제는 문화산업의 일부로서 오락 및 휴식 차원에서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장에 불과하고 결국에는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에 맴돈다는 주장이 있다. 또 하나 상반된 주장은 사회적 실천 활동인 문화의 일원으로서 축제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은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역동적 작용을 수행하며 문화 민주화의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양론이 갈라지는 이 지점에서 축제는 오락 차원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실천으로서 작용을 수행할 것인지 스스로 위상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실제의 축제로 거듭났었다(히딩크와 한국 선수들은 월드컵 전부터 내심 그렇게 될 것으로 점쳤을지 모르지만). 유럽처럼 사회 통합에 기여하거나 과거 남미처럼 사회 갈등 봉합을 위해 악용되던 축구는 2002년 한국에서 거국적 축제를 위한 유별난 장치로 급변하였다. 이구동성으로 1945년 광복 이후 최대의 감동과 감격을 다시 만났다는 소감은 당대의 진실이었다. 한국의 4강 진출이라는 범국민적인 공동 관심사는 전국의 수많은 광장들에서 혼연일체의 응원 놀이로 체현(體現)되고 마침내 사람들의 내면에서 꿈☆이 솟구치는 축제를 낳았다. 이후 12년이 지나는 사이에 꿈☆이 퇴색하면서 정글 속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도드라지는 오늘의 세태에서 보듯이 축제는 축제 이후의 일상에 준해서 의의가 재규정된다. 이런 뜻에서 축제는 일상의 정지인 동시에 창조적 연속일 필요가 있다.

   소통 없는 희열은 먹먹하고 희열 없는 소통은 막막하다. 축제에서 공동체는 희열과 소통을 매개로 부활하고 쇄신될 수 있다. 대학 공동체에서 축제는 소통과 희열을 지성의 이름으로 익히는 중요한 통과의례이다. 그러나 축제의 핵심이 왜곡된 결과, 대학 축제는 축제 없는 축제가 된 것 같다. 대학 공동체 내에서 대학과 공동체의 의제를 주목하는 소통은 등한히 한 채 무작정 관객 동원에 연연하는 안일한 길을 택해온 결과이다.

   부정(不正)한 기획의 축제는 축제가 아니다. 부정(不正)한, 부정의(不正義)한 것을 부정(否定)하는 광장, 그곳에 축제가 있다. 학내 연예인 초빙과 학내 주점 같은 부대 장치의 적절성 여부를 논하기 전에 마땅히 대학 축제의 목적부터 재론되어야 한다. 덧붙여, 축제가 삶의 총체성에 기반을 두는 그 만큼, 세상살이와 결부된 전공 분야들이 집결하는 대학답게 예비 전문가들이 총체적 축제를 구현해내려는 발상부터 절실해 보인다. 학내 축제를 창조하기 위해 최소 1년은 준비하기를 권고한다.

▲ 김채현 교수.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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